책 읽는 우체통

독서일기 8

by 이성주

'당분간 인간’을 읽고



몸살이라도 걸려 주었으면 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절대로 아파서는 안되는 때가 있다. 내 인생이 그런 절묘한 타이밍과 극적으로 불화하며 진행되어 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p78


나는 비교적 운이 좋은 편에 속하는 사람이다. 노력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취득했고 실보다 득이 더 많은 삶을 살아온 편이다. 왼손에서 돈이 빠져나가면 오른손에 돈이 들어오는 형국이랄까. 누군가 내 사주팔자를 풀면 그런 식의 풀이를 할 것이다. 그러니 부자인 적은 없지만 남에게 손을 내밀어 본 적도 없다. 부모 밑에 살 때도 그랬고 졸업을 하고 취업했을 때도 그렇고 지금까지 삶이 대체로 그랬다. 내가 철칙으로 삼은 것이 있다. 소득의 일정 부분을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기부하자. 오만한 판단일수도 있지만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세상과 함께 사는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나는 절망한다. 꿈의 좌절에서 삶의 고단함에서 부모를 잃고 이러저러한 상실에서 나는 절망하고 오열했다. 그렇다면 일상이 절망인 사람들에게 적절한 타이밍과 적절한 운과 적절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에게 삶은 어떠할까. 누군가는 불행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을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에겐 너무 많은 운과 기회가 어떤 사람에겐 한꺼번에 닥치는 불운과 불행을 설명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점점 더 기회 균등이 사라지는 사회에서 그런 현상은 늘어나고 있고 나처럼 기회와 상실이 적절하게 왔던 삶들이야 ‘이게 인생이야’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겐 삶이 고통이다. 왜 그토록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서유미의 ‘당분간 인간’에는 모두 여덟 편의 단편 소설이 편재되어 있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국어 교사를 하는 지인이 ‘스노우맨’이란 단편이 고등학교 국어책에 실려 있다는 이야기를 해서다. 이제 나이가 얼마 안 된 소설가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렸다니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노우맨’은 폭설이 내리자 나는 회사에 출근하지 못한다. 며칠간 집에 갇혀있다 드디어 출근하는 날 회사에서 연락을 받는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다 출근했다며 핀잔을 듣는 나는 회사에서 유능한 유대리도 나오지 않았다는 소식에 위로를 받고 출근을 서두른다. 사람들은 각각 삽을 들고 눈을 치워가며 출근을 서두르는데 나 역시 눈을 치우며 앞으로 나가지만 쉽지 않다. 그날 안에 회사에 출근할 수 있을지 걱정을 하며 앞으로 나가는 내 삽에 걸리는 존재, 일 잘 하고 잘 나가던 유대리의 시체다. 소설을 읽고 뭐하러 열심히 살았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너무 열심히 살다 남하고 다르게 출근하기 위해서 폭설을 뚫고 출근하려고 폭설에 갇혀 결국 죽어버린 유대리는 현대인의 열심히 살아봤자 결국 죽음밖에 없다는 허탈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한국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지 않나. 젊을 때 출세라는 명분을 위해서 열심히 살았더니 어느 날 퇴직할 날이 되어 회사를 나와 보니 잃은 건 건강과 가족이고 얻은 건 늙고 병든 몸이더라는 기가 막힌 현실. ‘당분간 인간’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 소설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시간적 배경은 지정하지 않은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는 내일의 어느 날이다. 삶은 현재와 대체로 비슷하지만 등장하는 소재와 제재들은 조금씩 현대 기술의 앞선 버전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저건 사람이 아니다’에 등장하는 나를 대신해주는 ‘그것’들이 그렇다. 나의 모습을 꼭 닮았지만 능력에서는 나를 능가하는 존재인 그것들, 그래서 지치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는 인간과 달리 그것들은 지치지도 않고 실수도 하지 않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결국 나를 대신하는 것들이 내 삶을 차지하기 시작하자 나는 ‘저건 삶이 아니다’고 외치지만 그 소리가 나를 아는 사람에게 들릴 것인가. 알고 보니 능력있던 회사 상사도 실은 사람이 아니지 않았던가. 소설을 읽다 보면 인간이 기계와 다른데도 기계처럼 일하기를 바라는 ‘신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긴장감이라는 건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의 이름 같았다.


오후 네 시쯤 되면 김은 자신이 구식 프린터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너무 많이 출력해서 늘 열 받아 있는 상태고 어딘가에 용지가 걸려 있으며 잉크가 다 소모된 것 같은 끔찍한 기분이었다. 걸린 용지를 빼내보면 구겨지거나 찢겨져 있고 보이지 않는 곳에는 종이먼지가 잔뜩 끼어 있었다. 고장을 감지한 프린터는 빨간불을 밝히지만 김은 그런 것조차 할 줄 몰랐으므로 성능 면에서는 프린터만도 못했다. 네시쯤 되면 김은 스스로 전원 버튼을 꺼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한국인의 울분 수치는 병적인 증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심한 울분 상태가 14.7%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의 숫자는 타인을 향해 혹은 자신을 향해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숫자라고 한다. 국민의 반 이상이 울분 상태를 느끼고 있는 이 현상은 정상이 아니다. 불평등과 부조리와 불합리가 판치는 것은 둘째치고 노력이 무화되는 지점에서 왜 사는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면 이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서유미의 소설 속의 인물은 그런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왜 이토록 열심히 살고 있는가. 그렇게 살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과연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마사지사 k는 열심히 일해서 고층 아파트로 이사하지만 그 방에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오히려 살갗이 부딪치고 가족의 숨결을 느꼈던 지하 방에서 편안한 잠을 잔다. 반대로 L은 k가 살던 지하 방에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녀는 일자리를 잃었고 일자리를 다시 찾지만 쉽게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서로의 집에서 단잠을 자는 그녀들은 그렇게 친구가 된다. 두 사람 다 열심히 일했지만 자기 주변인들에게 좋은 일만 시키고 정작 자신들은 충족된 잠을 제공하는 잠자리를 잃는다.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는가. ‘그곳의 단잠’은 진짜 그녀들의 잠인가.


‘그곳의 단잠’, ‘삽의 이력’, ‘당분간 인간’, ‘타인의 삶’, ‘세 개의 시선’, ‘검은 문’을 모두 읽고 나면 씁쓸하다. ‘당분간 인간’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어떤 사람은 물렁해지고 어떤 사람은 딱딱해지는 병에 걸린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고 능력을 수치화해서 평가하는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우화처럼 묘사한 소설이다. 자존감을 갖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평가를 받는 사회에서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서유미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정말 불편하다. 그녀는 내가 애써 외면하는 것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운 좋게 살아왔는가 싶은 안도감보다는 어쩌면 나도 소설 속에 있는 인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흔하게 볼 수 있는 군상들, 그들은 소리 없이 아우성치며 이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소비되고 소모되어 가고 있는데 난들 그들과 다를 게 뭘까. 나는 자본의 맨꼭대기에 있는 존재도 아니고 먹이사슬의 맨 위에 자리하고 있지도 않다. 나 역시 소모되고 소비되고 있는 현재에서 다를 게 없다는 슬픔이 밀려든다. 소설을 쓰는 이의 숙명이랄까. 이 시대를 읽는 소설가의 책무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하지만 작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 건 옳지 않다고 다시 생각한다. 책을 덮고서도 오랫동안 슬프고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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