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10
‘땅의 혜택’(크누트 함순/문학동네)를 읽고
그는 골수까지 황무지 사람이었으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농부였다. 그는 먼 과거에서 온 사람이었고 미래를 보여주는 사람, 처음으로 농사가 시작되던 시대의 남자, 토지를 개척하던 시대의 남자, 9백 살이 되었으면서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p475
노르웨이의 작가 크누트 함순의 ‘땅의 혜택’은 낯선 소설이다. 작가의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작품명도 생소했다. 소설을 읽으면 노벨상 수상작이라는 이 작품의 명성이 무색해진다. 그러다 이 작품이 1920년에 발표한 소설이라는 걸 확인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에 수상한 작품에서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크누트 함순은 독일 나치에 호의적이어서 도덕적인 지탄을 받았다고 한다. 작가에게 윤리적 문제는 결국 그가 지향하는 문학에서의 주제와 연결되어 진정성의 의심받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작가를,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배경에는 인간에 대한 실망이 클수록 삶에 대한 회의가 깊을수록 사회에 대한 반감이 클수록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 사람들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 작품 속에서 보편적 가치를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있다고 보기에 다시 희망을 품는 것일지도 모른다. 크누트 함순의 ‘땅의 혜택’이란 작품이 노벨상을 받은 배경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후 작가가 보여준 행위와 발언들은 그가 작품 속에서 드러난 땅에 대한 신뢰에 인간의 삶의 방향들이 진실한가에 대한 질문이 따랐을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기계의 일부처럼 취급받고 산업의 발전과 유통의 발전, 금융업의 발전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문제와 훼손되어 가는 자연에 대한 안타까움이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사람들은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직면했을 것이었다. 생명이 그토록 쉽게 스러질 수 있고 그것이 같은 종족에 의해 이해할 수 없는 살육이 자행될 때 오는 절망감이 너무나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인간은 더 큰 전쟁을 겪었고 전쟁의 역사는 지금까지 지엽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인간은 희망을 주는 존재인지, 인간이 사는 이 자연이 희망을 품은 곳인지 지금은 헛갈리고 있을 정도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주는 혜택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땅은 우리에게 생명과 삶을 선사한다. 인간에 의해 훼손되고 있는 땅이 언제까지 인간에게 우호적일지 우리는 가늠할 수가 없다. 그것이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일 것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이사크’는 큰 바위 얼굴 같은 인물이다. 묵묵히 땅을 경작하고 바깥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그는 묵묵하게 땅에 씨를 뿌리고 가축을 기르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땅에서 얻은 획득물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를 도와주고 결국 그의 아내가 되는 앙에르는 ‘언청이’라는 태생적인 결함 때문에 어떤 남성에게도 선택되지 못해 결국 이사크의 아내가 되었지만 기본 성정이 부드럽고 현명한 여성이다. 하지만 창세기의 ‘이브’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듯이 자기를 닮아 언청이로 태어난 자기 아이를 죽임으로써 죄를 짓고 도시로 떠나 도시에서의 삶을 맛본 다음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방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앙에르는 인간의 나약하고 환경에 쉽게 적응하여 변화하는 모습을 대변해 준다. 그러나 그녀 역시 바위처럼 변함 없이 자신을 지지하고 바라봐주는 남편 이사크 덕분에 도시 사람이 보여주는 교만과 사치를 떨쳐버리고 다른 남자와의 사랑 행각도 접고(물론 그녀의 의지가 아니라 이사크의 인내와 남자가 떠나버림으로써 끝난 것이지만) 애초에 보였던 그녀의 모습을 되찾는다. 또 그들의 자식들인 엘레세우스와 시베르트를 통해서 부모 세대가 보여준 모습이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 속에서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가장 독특하고도 기이한 인물은 ‘게이슬레르’이다. 처음에 게이슬레르가 등장한 것은 지방행정관으로서다. 그는 공유지에 스스로 씨를 뿌리고 수확하여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가는 이사크에게 국가로부터 땅을 이용하고 있으니 그 이용값을 내라며 이사크를 찾아온다. 이사크는 게이슬레르의 말에 거역하지 않고 기꺼이 그러겠다고 답한다. 이사크는 한 번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저항을 거부하거나 반역하지 않는다. 그는 그 모든 재앙이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이사크는 가뭄이 오고 한동안 굶주림이 올지 몰라 걱정이 되지만 결국 비는 오고 그토록 마른 땅 속에서도 인간에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식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사크는 자연에게서 배운 지식과 상식으로 인간을 대한다. 자기의 딸을 언청이라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살해한 앙에르를 용서하고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겼던 그녀를 다시 품는다. 그는 세상의 일에 순리가 무엇인지 깨우치고 순응한다. 게이슬레르는 이사크에겐 불가사의하면서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다. 이사크가 경작한 땅이 노다지가 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게 되는 계기를 만든다. 그 안에서도 이사크는 변함없이 땅을 경작하고 땅의 고마움에 전 인생을 건다. 게이슬레르는 이사크의 아들 시베르트에게 말한다. 노르웨이에는 이사크 같은 사람 32000명이 필요하다고. 물건을 사고팔고 광업을 하고 물건을 만드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소중한 사람은 이사크처럼 묵묵히 땅의 고마움과 땅에서 얻는 것의 기쁨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 책의 중심 내용이다.
책을 읽으면 지루하고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답답한 부분이 있다. 1910년대에 써진 책 내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때문이기도 하다. 192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기대감은 이 책의 수상 이유에 대해 의구심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참을성을 갖고 이 책을 읽다 보면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나 ‘백 년 동안의 고독’처럼 판타지 같은,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근원적인 질문과 삶에 있어서 우리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더군다나 4차 산업의 등장이나 ai와 로봇의 발달 과학의 무한 발전의 속도와 현재가 어디까지 진행될지 모르는 시점에서 우리가 한번은 뒤돌아봐야 할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적 꿈꾸었던 미래는 호기심을 채우는, 희망 가득한 미래였다. 새로운 것의 등장은 삶을 더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내게 미래는 두려움이 되었다. 책을 통해서 영화를 통해서 매체를 통해서 만나는 미래였던 현재는 점점 더 편리함 이면에 소외되는 인간이 드러났고 늘어나는 인간을 대체하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씨스템과 기술이 이제는 두렵기까지 하다. 유토피아가 될 줄 알았던 미래는 점점 디스토피아가 될 거 같은 두려움은 나뿐만이 아닌 거 같다. 언젠가 읽었던 ‘먼 북쪽’에서도 미래의 자연과 환경은 더 이상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이사크가 뿌리기만 하면 싹 트던 땅에서 더 이상 인간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양식이 될 식물이 자라기는 힘들다. 인간은 너무 많이 자연을 훼손하고 함부로 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땅은 얼마나 많은 선물과 생명을 주는가. ‘땅의 혜택’은 백 년 전에 이미 우리가 자연을 땅을 어떻게 대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 책은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의 소설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라다크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하던 노르베리호지의 1992년도에 써진 책이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소설가에 의해 소설로 완성된 것이다.
자네들은 날이면 날마다 푸른 산을 바라보지.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이 아니고 오래된 산, 우리가 알 수 없는 먼 옛날부터 서 있는 산이야. 그 산이 자네들의 벗이라네. 자네들은 그렇게 하늘과 땅과 함께 살아가고 하늘과 땅, 넓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살지. 손에 칼도 필요 없고 미래에도 무장을 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잖아. p468
저쪽에서는 이사크가 밭을 가로지르며 씨를 뿌리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장사, 통나무와도 같았다. p475
그는 골수까지 황무지 사람이었으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농부였다. 그는 먼 과거에서 온 사람이었고 미래를 보여주는 사람, 처음으로 농사가 시작되던 시대의 남자, 토지를 개척하던 시대의 남자, 이백살이 되었으면서도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p476
이사크를 과거에서 온 미래를 보여주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라다크’를 오래된 미래로 표현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와 같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책은 분명한 중심 주제가 있다. 그래서 읽으면서 구태하고 재미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또 이미 많은 사람에 의해 이야기 된 주제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의 과학과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도 우리의 생명은 이 땅에서 출발하고 이 땅에서 마지막을 맞을 것이다. 땅의 혜택을 우린 무시할 수 없다. 책을 덮으며 이 책이 갖고 있는 가치는 그 점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는 씨앗을 뿌릴 때마다 주의를 기울였고, 따뜻한 마음으로 경외심을 품었다. 자, 이제 이 씨가 싹이 트면 이삭이 되고 곡식이 열릴 것이다. 온 세상 어디에서나 다 마찬가지다. 팔레스티나에서도, 구르브란스달 계곡에서도. 아, 세상은 얼마나 크고 그가 씨를 뿌리는 밭은 얼마나 작은가! 이 밭이 온 세상의 중심이었다. 그의 손에서 씨앗이 퍼져나갔다. 하늘에는 구름이 끼어 일하기에 좋았다. 이슬비가 올 거 같았다. p38
묵묵히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에도 나무를 심었던 사람 ‘양치기 노인’처럼 이사크는 묵묵하고 튼튼하고 반듯하게 씨앗을 뿌리고 땅을 경작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대한다. 자연의 일부처럼. 그 자체가 자연인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리하면 얼마나 좋을까. 앞서가는 것만이 발전하는 것인지 책을 덮으며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