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17
'먼 북쪽'을 읽고
“이건 선악의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생활 방식을 선택하고 감내하느냐의 문제야.”p291
미래에 대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내가 비극적인 성품이나 부정적인 성격이어서가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고 내가 속해있는 사회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운영되고 지탱되는 사회이길 바란다. 그럼에도 세상은 점점 비극적으로 변하고 있고 부정적인 상상을 하게 되는 지점으로 향하고 있다. 나는 여자로서 생명을 품고 이 세상의 미래의 어느 부분을 채워줄 의무를 다했지만 반면 그들에게 암울한 미래를 선물할까 싶어서 두렵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래에 그것도 가까운 미래에 일본의 후꾸시마에서 벌어졌던 일이 우리에게도 벌어진다면, 체르노빌에서 벌어진 일이 나에게나 내 자식들에게 벌어진다면 우린 어떻게 생명을 이어갈 것이고 어떻게 생존의 질문에 답할 것이며 인류의 지속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는 어쩌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미래를 위한 숙제처럼 생각해볼 일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미 어떠한 형식으로든 그것에 대한 고민을 한 작가들이나 영화 감독들의 작품을 찾아서 보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들의 이기심이나 욕심 때문에 벌어질 지구의 모습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먼 북쪽’은 영웅이 없어서 초월적인 능력이 없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대로 기술되어 있기에 하루키라는 작가의 흥미를 끌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매끄럽게 번역되어 있지 않은 문장과 문체들로 인해서 독서가 방해된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이 책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꽤 치명적인 단점으로 인해서 앞으로 어떤 전개가 가능할지 예측할 수 없는 소설의 방향이나 ‘메이크피스’라는 여인의 강인함이 주는 흥미가 반감된 것만은 분명하다. 다행히도 중반을 넘어서 그녀의 여정과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흥미를 자아내는 이야기들이 다행히도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아닌가 싶다.
“시간은 균형감각이 있다. 단순한 생활방식일수록 수명이 길다. 복잡한 기계가 가장 먼저 길옆으로 나가떨어진다. 어떤 물건이 얼마나 오래 갈지 알고 싶다면 그 물건이 주변에 얼마나 오랫동안 있어왔는지 보라. 제일 최근에 생긴 물건이 제일 먼저 사라진다. 항상 주변에서 보는 물건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남아 있으리라.”
이 책은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이다. 미래에 대한 영화나 소설들이 공통적으로 디스토피아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크다. 더 편해지고 더 윤택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미래는 왜 우울하기만 할까. 사실 이 책을 읽는 동안 소설 속 사건이 미래라는 걱을 깨닫는 데도 어느 정도 독서가 진행된 다음이었다. 미래라고 예측할 수 없이 써내려간 소설 속의 상황들은 독서를 하는 동안에도 앞으로만 가는 주인공 ‘메이크피스’의 여정처럼 독자를 몰아붙이며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이 멀지 않은 미래의 시간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이것이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년이란 시간을 꽉 채운 휴대폰이 고장이 나서 수리를 맡겼더니 수명이 다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휴대폰이 세상에 등장하고 난 이후 새로운 것을 갖고 싶은 욕망에 멀쩡한 것을 교체했지만 지금은 고장이 나서 새 물건으로 교체하게 된다. IT기술의 발전은 그 속도가 점점 빨라져 소위 ‘얼리 어답터’라는 말을 듣는 사람조차 새 물건에 적응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기계의 교체주기는 빨라지고 기능은 점점 복잡해진다. 기능이 복잡해졌지만 그 기능을 습득하기만 하면 인간은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 기능에 기대어 우리가 뇌로 생각하고 실현했던 것들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이도 기계가 다 해주는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능을 인간의 뇌가 아닌 기계의 능력에 넘겨줌으로써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기계는 스스로 진화를 거듭하고(지금은 인간이 기계의 진화를 도와주지만 가까운 미래에는 기계가 스스로 진화하지 않을까) 소비 욕구가 강한 인간들에게 최적화되어 그 수명은 더 짧아진다. 우리의 필요는 소비와 함께 문명의 기구들을 발전시키고 진화시키지만 대신에 더 많은 쓰레기와 빠른 순환을 요구하며 우리 삶의 환경을 척박하게 만들고 있다. 저자는 체르노빌 원전 지역에서 농사를 지으며 원시의 상태와 유사한 삶을 영위하는 어느 여인에게서 영감을 얻어 이 소설을 집필하게 되었다는데 소설보다 원전사고가 났던 지역에서 살고 있다는 여인의 실제 삶에 더 관심이 간다. 나는 현재의 삶이 언제까지 영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회의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언제든 인간의 삶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상태로 되돌리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다. 지구의 역사를 통틀어 인류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기도 마찬가지이다. 인류의 종말이라 할 수 있는 원인이 기근과 방사능 유출, 세균 유출, 등 여러 요인으로 좁혀지고 있지만 결국 인류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는 사실은 소설 전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 환경에서 인간에게 법과 윤리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힘을 가진 자들을 중심으로 중심 권력이 형성되고 그들을 추종하는 자들과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들 간의 주종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설 속 ‘삶이란 습관이다’라는 말처럼 인간들은 자신들이 형성해 왔던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그 틀 안에서 머물려는 성향이 강하다. 메이크피스가 어떤 환경에서도 삶의 강한 의지를 갖고 개척하고 억압에 굴종하지 않은 성향은 그녀의 삶의 태도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메이크피스는 지식의 가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책을 태우려는 핑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던 것도 그렇고 외과의였던 샴수딘이 허무하게 죽어가게 되는 상황을 안타까워 했던 이유도 그래서이다. 반면 그녀는 문명사회에서의 지식이나 상식적인 선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도 아버지를 통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
‘ 아버지는 6개 국어를 하지만 못 하나 제대로 박지 못했다. 사회가 존재했을 때는 대통령과 정부를 상대로 법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협상을 통해 땅을 불하받고 정착 추진 대표단의 일원으로 인생이 어때야 한다는 비전을 수만의 어휘로 포장할 능력도 있었지만, 정작 그 가치를 방어할 때는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했다. 세상을 선하게 가꾸자는 주장으로 평생을 버티면서도, 그의 선은 이 땅을 손톱만큼도 바꾸지 못했다. 말로 선을 행할 수는 없는 법이다.’
메이크피스. 그녀는 알고 있다. 상식의 선이 문명이 죽어간 사회에서는 얼마나 무의미한지. 그럼에도 수천 년간 쌓아왔던 방대한 지식이 허망하게 스러져가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도. 그녀에게 남은 것은 생존의 본능만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인 것이다. 그녀가 핑을 구하고 퉁구스 소년을 구하고 줄루카와 샴수딘과 함께 도망가려던 계획 모두는 자신만이 살아남으려고 하는 본능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선이지만 사실 그녀도 알고 있는 것처럼 선이란 때로 자신의 생존에 있어서 불필요한 감정이라는 것도. 남자들이 그녀에게 보이는 행동들은 무자비한 폭력뿐이었으니까. 위기의 지구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덜 위험스럽게 보이고 더 생명력 질기게 살아남지만 소설 속의 권력은 남성에게 집중되어 있으며 생존의 모범처럼 보이는 메이크피스조차도 끊임없이 남자들의 위협 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삶을 버텨내고 있을 뿐이다. 꽃을 피우고 생명을 잉태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기하는 것은 여성의 몫이고 파괴하고 죽음을 유도하는 것은 남자들의 몫인 것은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의미 있게 전해지고 있다. 소설의 말미에 그녀의 독백들은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이 생애에서는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
‘그러고보니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노년은 언제나 혹독하다는 사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코딱지만큼도 없다. 내 장례식에 올 필요도 없다. 다만 그대들한테 남겨줄 세상에 대해선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더욱이 내 어린 시절과 너무도 다를 수밖에 없을 그대들의 어린 시절.’
그녀가 남기는 이야기들은 어쩌면 작가가 우리들에게 남기고 싶었던 말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린 너무나 쉽게 쓰고 버리고 욕망하며 현재를 살고 있다. 이렇게 살아가는 현재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답해 줄지는 사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문제는 우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 뒤에 올 이들이 겪을 고통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세상의 종말은 매번 세기에 한 번씩 반복되어 벌어지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지키고 후손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잃었지만 이젠 더 이상 타인을 위해 죽어갈 사람들을 찾기란 쉽지 않다. 우리 모두가 함께 죽거나 함께 살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때 우리에게 선악이란 정말 의미가 있을까. 그러고보면 삶은 언제나 선택의 문제였지, 선악의 문제가 아니었던 듯도 하다.
‘이건 선악의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생활방식을 선택하고 감내하느냐의 문제야.’
‘머나먼 도시가 지니고 있을 질서와 정의가 나의 세상에도 의미를 던져 주리라는 희망, 그 희망도 나를 잡아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곳이 이미 지나쳐온 지 오래이다. 나는 지금껏 어둠 속에 서 있으면서 열쇠구멍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만으로 방 전체를 보려고 애쓴 꼴이었다.’
우리에겐 이제 점점 희망이 사라져가고 있다. 삶에서 희망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살아야 할 목적도 사라져가는 것이다. 굳어져가는 빈부의 격차와 해결할 수 없는 환경, 전쟁의 위협, 모두가 사라질 수 있는 핵폭탄과 방사능, 바이러스와 세균에 의한 종말, 모두가 가능한 일이 되어버린 현재에 우리가 앞으로 선택해야할 생활방식과 감내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먼 북쪽이 멀리 있는 미래가 아니라 우리 발 앞에 있는 미래이며 우리에게 삶을 다시 돌아볼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전에는 본능이 담당하던 자연 본래적 절차와의 관계성을 우리 다수가 이미 잃었다고 느꼈다. 우리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일반적이지 않은 것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어쩌다보니 이 역사적 순간에 삶을 부여받았다는 순수한 우연을, 너무나도 당연히 여겨왔다. 몇 세기에 걸친 기술 혁신이 있었고, 투자가 있었고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지구 자원을 마치 ‘물처럼’ 써왔다. 그 덕에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추위도 더위도 느끼지 않고, 자동차 엔진과 전화기의 마이크로프로세서와 냉장고 안의 식푸이 어떻게 해서 여기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