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를 읽고
독서일기 22
굴참나무 허리에 반쯤 박히기도 하고
물푸레나무를 떠받치기도 하면서
엎드려 있는 나무가 아니면
겨울숲은 얼마나 싱거울까
산짐승들이나 나무꾼들 발에 채여
이리저리 나뒹굴다가
묵밭에 가서 처박힌 돌멩이들이 아니면
또 겨울숲은 얼마나 쓸쓸할까
겨울 숲(신경림)
‘내가 그녀와 결혼한 것은 ,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p9
‘도대체 저렇게 저기중심적일 수가. 나는 아내의 얼굴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차분해 보였다. 뜻박이었다. 그녀에게 저토록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었다니. 저렇게 비이성적인 여자였다니.’p20
관계를 맺는 사람들끼리는 일정부분 ‘갑’과 ‘을’의 관계처럼 지배적이거나 굴종적인 자세를 각자가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것은 무의식의 행위로 드러날 뿐이지, 자신이 그것을 인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그 관계의 부당함을 깨닫는 경우는 한쪽이 의식화의 과정에서 일어난다. 교육이거나 환경적 변화가 한 사람의 의식을 깨우게 되는 순간 갈등은 시작된다. 세상의 많은 관계들이 불평등하고 불합리하며 부조리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은 채 인식하기도 전에 그 편안함에 기대에 일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다. 스톡홀름 신드롬처럼 지극히 비정상적 관계에서조차도 자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많은 경우 우리가 제대로 된 관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할지 모른다. 갈등의 시작은 그때부터이다.
<채식주의자>의 ‘그녀’는 화자의 서술대로 자신이 대충 대접해도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는 여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가 ‘변하자’ 화자는 그녀를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여자’로 규정한다. 사실 화자가 그녀를 선택한 과정에서 보면 지독히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사람’은 바로 화자 자신이다. 갈등이 시작된 것은 ‘그녀’가 자신을 인지하기 시작해서이다. 육식에 길들여진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의지보다는 아버지의 폭행, 제멋대로인 남편과의 관계를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내면의 목소리든 스스로 선택한 기회든 간에 말이다. 그녀의 자기 인식은 꿈에서 시작되었다. 고기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육식을 물어뜯는 얼굴의 자신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는 공포스런 꿈을 꾼 후 그녀는 바뀐 것이다.
불면증을 뜻하는 insomnia의 somnia는 꿈을 가리킨다. 부정어 in이 붙어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이 잠을 잘 수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인 것이다. 꿈을 꾸지 않는다, 는 것으로 자기를 부정하고 과거와 현재를 단절하는 그녀의 시작은 이 소설 전체의 갈등과 관계를 뒤틀고 자신들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만드는 단초가 된다. 화자와의 관계는 그가 ‘내가 들어가 보지 못한, 알 길 없는, 알고 싶지 않은 꿈과 고통 속에서 그녀는 계속 야위어갔다’고 말하는 것처럼 애초부터 화자는 그녀와 교통(交通) 혹은 소통(疏通)하지 못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그녀가 그간 그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도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그것은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회사 사람들과 하게 된 저녁 식사 자리에서 고기를 거절하는 그녀를 두고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는 일방적이다. 먹는 행위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데도 불구하고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그녀의 ‘선택’은 순간 웃음거리가 된다. 그들은 수렵생활을 했던 원시인들을 들먹이며 육식은 인간의 아주 오래된 습관이라며 농담처럼 섬뜩한 이기심을 드러낸다. 소설 속의 모든 관계는 이와 다르지 않다. 처제의 몽고반점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그녀의 몸과 자신의 몸이 교합하여 하나의 합일된 꽃의 형체를 제대로 구현하고자 하는 형부의 욕망은 예술을 위한 욕심이었지만 육욕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안정된 삶을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그녀를 선택하는 영혜의 남편과 마찬가지다. 일방적인 관계에서 우린 어떠한 따듯한 기억도 도출해낼 수 없다. 그녀의 꿈속에서 드러나는 피와 살육의 형태는 그녀 내면의 욕망과 그 욕망에 희생되는 생명들에 대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 희생되는 인물 속에 가장 중심에 있는 사람이 바로 영혜 자신인 것이다. 어릴 적 가정 내에서 벌어졌던 폭력이나 자신을 물었던 개를 처참하게 도륙해서 자신의 입으로 넣었던 육식에 대한 탐은 그녀뿐 아니라 현대인 모두가 욕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이 뒤틀린 욕망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현실의 삶을 이어간다. 현대인이 욕망과 현실의 괴리에서 이룰 수 없는 불만족을 폭력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소설 속 인물은 우리들의 숨겨진 모습들을 지나칠 정도로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참담한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다.
‘나무는 사실상 전 우주적 몽상의 가장 적합한 기반인 것 같다. 왜냐하면 나무는 인간의 의식을 포착할 수 있는 길이요, 우주에 생기를 부여하는 생명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대립되는 두 개의 무한을 서로 연결시키는 동시에 상반되는 의미를 갖는 대칭적인 두 심연인,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어두운 지하의 물질과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에테르가 서로 결합하는 나무 앞에서 인간은 꿈을 꾼다. 묵묵히 서 있는 나무줄기에 몸을 기대면 인간은 나무에 동화되어 그 내적인 움직임을 들을 수 있게 된다.’(나무의 신화/ 자크 브로스)
영혜가 꿈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는 동물성의 세계, 폭력과 살육의 세계로부터 도망가듯이 빠져나와 현실의 식물성을 선택하는 데는 인간 내면에 있는 근원적인 생명에의 지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화자와 그 가족의 눈엔 영혜가 죽으려고 하는 것처럼, 또 죽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생명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발악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향하는 삶에의 욕구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식사를 통해 실제로 우린 생명을 단축시키고 있지 않은가. 영혜의 가족들이 보여준 육식에의 탐욕은 다름 아닌 우리들 모습의 실사 판이라고 할 수 있다. 목숨을 단축시키는 식사를 거부하는 것에서 작가는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 같다. 욕망으로 대변되는 식사, 그리고 그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폭력성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살고자 하는 것들이 타인의, 타자의 죽음 위에서 지속되었던 것이 아닌가.
“밥 같은 거 안 먹어도 돼. 살 수 있어. 햇빛만 있으면.”p186
영혜의 죽음으로 향하는 단식은 삶의 의미가 사라진 현실에서 진짜 삶에 대해서 묻는다. 살고 싶은 것인지, 살고 싶지 않은 것인지.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죽음과는 또 다른 의미다. 우리는 죽지 않았지만 살지도 않은 상태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몸 속에서 쏟아진 핏덩어리를 통해서 죽음을 가깝게 느꼈던 그녀(나무 불꽃의 화자)는 실제로 아무 것도 아닌 폴립 하나를 떼어내고 남편과의 의무적인 잠자리를 거친 후에 자신이 살고 싶은 것인지에 대해서 묻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영혜의 단식과 일맥상통하다. 빈 가슴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서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우주의 기반이 나무라는 것은 참 아이러니다. 그녀는 달려가는 구급차 속에서 영혜에게 속삭인다.
“……이건 말이야.”
“……어쩌면 꿈인지 몰라.”
잠을 자지 않은 상태, 꿈을 꾸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는 영혜의 꿈 속과 같은 생살을 뜯고 피를 흘리는 육식에 탐하며 눈빛이 흐려지는 탐욕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실은 현재는 꿈보다 더 잔인하고 우리의 진짜 꿈은 식물성의 새가 날아다니는 생명 가득한 세상이 아닐까. 책을 덮고 고기를 뜯는 나를 상상해본다. 한 끼 식사에 고기 반찬 없으면 허허로움을 느끼는 나에게서 잔인한 동물의 폭력성을 느끼게 된다. 현재는 꿈보다 언제나 잔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