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혹은 진심이라는 일루젼

by 이성주

처음 미술을 배울 때 선생님이 그리라고 했던 것은 선이었다. 다양한 선들을 이어서 그었고 다음엔 곡선, 그 선들의 굵기와 진하기를 더해 몇 번의 연습을 마친 후 사물을 그리는 작업이 반복되었다. 구를 그리기도 하고 원뿔과 원기둥도 그리고 보이는 위치에 따라 그림을 그리라고 한 다음 그림자를 표현한다. 생각보다 지리한 그 작업은 미술의 기초 작업이었다. 그 작업 중 하나가 컵 그리기였고 논술 수업을 할 때 그 작업은 아이들의 생각을 말랑말랑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커리큘럼 중 하나였다. 하나의 컵이 보이는 시각에 따라 입체적으로 혹은 평면적으로 보이고 그것을 직선으로 표현했을 때는 전혀 다른 사물처럼 보이는 그림 그리기는 우리의 시각이 자칫 얼마나 편향적으로 보일 수 있는지를 시도하는 작업이었다.

사물을 다르게 그렸다고 해서 컵의 본질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피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소설집은 우리가 이미 접한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인식을 뒤집어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의심하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면 이미 이 사회에 적응한 사람들과의 대화가 불가능하게 되어버린다. 결국 우리는 세상이 만든 규칙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책상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책상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책상이 나무로 만들어졌든 쇠로 만들어졌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든. 그럼에도 책상의 이름을 바꾼다고 하면 우린 혼란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고 결국 책상의 이름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처럼 컵은 보이는대로 그려 전혀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보인다 해도 컵이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 본질이란 것이 소재가 무엇이든 이 세상에 나와서 우리의 인식이 정해준 그대로. 그 어떤 모습도 결국은 컵이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지 않을까, 문득 생각하게 된다. 상처받는 관계를 돌이켜 보면 내 진심, 혹은 진실을 상대가 몰라주는 것에서 오는 실망감이 가장 컸던 것 같다. 내가 보여주는 진실을 외면하고 다른 이가 보여주는 모습(내가 보기엔 그것이 가짜인 것만 같은데)에는 감동하는 상대의 어리석음을 탓하기도 한다. 그런데 상대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니 그에겐 어떤 모습도 다 진심이고 진실이었지 않나, 생각이 미친다. 위치에 따라 보는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컵인 것처럼 말이다. 따지고 보면 나의 편협함이 내 마음만 내 시각만 진심이나 진실을 표현하거나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돌아보게 된다. 결국 컵이라는 본질을 보지 못한 채. 그래서 내가 받은 상처 역시 사실은 환각이다. 그 혹은 그녀가 내게 보이는 행위는 내 행동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인 어떤 행동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그런데 우린 보여지는 모습으로 판단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의 철학은 인간이 원래 어떤 특정한 성격이나 성질 없이 세상에 와서는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 간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결국 인간에겐 존재하는 것이 먼저요, 선택적으로 자신의 성격이나 성질이 결정된다는 말인데 어떤 의미에서 격하게 공감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공감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한 인간의 성격이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거의 대체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나 본래 타고난 성정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재하는 것이 우선이란 것은 인간이 시간과 공간 위에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실재는 본질보다 위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의문처럼 한 인간의 존재와 본질은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다. 다만 실재하는 나는 컵의 모양을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처럼 사람도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일정한 패턴의 변화가 있다는 사실이다. 보통의 경우 일관성을 유지한다고 하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나의 태도는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 모습이 내가 아닌 것은 아니다. 다만 때로 인간은 자기를 기만하고 타인을 기만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진실이란 의미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가 그 행위를 하는 목적에서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행위에 특별한 목적이 숨어 있는 것이고 사회적 관계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항상 진심으로 진실되게 상대를 대했다. 당신도 그러했다고 믿는다. 그때의 상황에 맞게. 우린 상황에 따라 진심, 진실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등뒤에서 변하는 그것들은 그러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믿었던 우리의 환상이 판단을 재촉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환상을 고집하고 믿고 싶은 건 그게 결국 환상으로 그친다면 너무나 서글프고 우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에 기대고 싶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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