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우체통

독서일기 3

by 이성주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스위스에서 리스본행으로 직접 가는 열차는 없다. 파리를 경유해서 가거나 스페인을 경유해서 가야한다. 내가 걸어본 리스본은 아름답고 한적했다. 나는 유럽이 아닌 아시아에서 스페인 마드리드를 거쳐 리스본에 들어갔다. 저녁에 도착한 리스본의 첫 인상은 하늘에서 본 불빛이었다. 해안을 따라 도시를 울타리로 조명이 켜진 리스본은 아름다워 보였다. 늦은 시간에 도착해 서울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리스본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렇게 리스본이 내 가슴 속에 훅하고 들어와 아직도 포르투갈이란 나라의 인상을 강하게 남겨주었다. 그래서 이미 영화로 두 번이나 봤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책을 읽을 마음이 생겼다.


그가 정말 원했던 것은 어떤 사람이 아니라, 그가 잡으려고 했던 삶의 무대였지요. 죽음에 이르기 전에 한번 완벽한 삶을 살고 싶다는 듯, 지금까지 사람들이 마치 그를 속여 왔다는 듯이 온 힘을 다해 잡으려던 완벽한 삶의 무대. p552


내 삶의 주인공은 나이지만 실제로 나를 인식하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주인공이 아닌양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나를 주변인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열등감 때문에 상처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 때문에 점점 나는 없어지고 다른 사람이 주인공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결국 내가 이 세상을 감각할 때에야 이 세상의 존재들이 깨어나는 것이다. 각각의 인물들이 보고 듣고 만지고 할 때 확인되는 삶, 결국 각각의 존재가 자신만의 무대에서 완벽하지 않아 보이는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어쩌면 존재의 의미에 대한 자각을 하는 순간 떠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자신이 좋아하던 여학생 앞에서 창문을 넘어 교실을 벗어난 순간처럼. 그러나 그런 기회는 사람들에게 쉽게 오지 않고 또 온다 해도 그걸 과감하게 실행하기란 더욱이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그레고리우스가 자신의 삶의 무대였던 바렌을 떠나 리스본으로의 여행을 감행한 것은 삶의 변곡점이 되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지 모른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가 떠남을 선택하도록 했던 사건, 다리 위에서 죽기 위해 뛰어내리려 했던 여잔 어쩌면 인생에서 빛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준 귀인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린 귀인을 어떤 커다란 선물을 주는 존재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삶의 어느 지점에서 내가 진정으로 가야할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귀인이 아닐까. 그녀의 입에서 나온 작은 소리, ‘포루투기스’는 언어학자였던 그레고리우스에게 흥미를 자아내게 했고 서점에서 발견한 아마데우의 책과의 만남은 운명이 되었다. 사실 우리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우리 인생은 바람이 만들었다가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헛된 형상.p537


그럼에도 우린 이 바람 같은 인생에 얼마나 많은 허망한 욕망으로 소비하는가.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p570) 이렇게 생각하는 게 과연 건강한 생각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우리 인생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좇는 허망한 욕망과는 다른 더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이고 그건 추악함을 동반한 것이 아닌 아름다운 무엇이라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강하게 나를 지배한다. 책 속에 빠지면서 나는 그레고리우스가 걷는 리스본 길을 걸으며 프라도의 철학과 그의 방황과 그의 사랑을 쫓는다.


스위스 바렌의 김나지움에서 고전문헌학 선생을 하는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날 출근길에 다리난간에서 밑으로 뛰어내리려는 여인을 구한다. 엉겁결에 그녀를 자신이 수업하는 학교 교실까지 데려온 그레고리우스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포루투기스’라는 말에 이끌려 시내의 서점으로 가 포루투갈어와 관련된 책을 찾는다. 그러다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다소 생소한 제목의 책을 발견한다. 포르투갈어로 써진 책은 그레고리우스를 강하게 이끄는 힘으로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으로 향하게 한다. 리스본에서 만나게 된 포르투갈의 현대사와 그 현대사의 물결 속에 불꽃처럼 저항하고 고민했던 사람들을 만난다. 아마데우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 조르지, 주앙, 아드리아나, 에스테파니아, 마리아 주앙을 만나 한번도 만난 적 없는 남자 아마데우의 삶에 다가간다. 그레고리우스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이지 못하고 수동적이었던 자신과 아버지의 신뢰와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던 아마데우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하지만 아마데우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속마음-천재였던 아들에게 늘 전전긍긍하고 그의 시선에서조차 주눅든- 은 아마데우의 아버지가 미처 건네지 못한 편지로 그레고리우스만이 알게 된다. 아마데우는 독재자 살라자르의 개 멩지스의 목숨을 구하면서 의사로서의 소명감에 충실하지만 그 일로 인해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일에 대한 죄책감으로 반정부 지하 단체에서 활동하게 되는데 그 안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 조르지가 사랑했던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시인이었던 아마데우는 혁명가이기 보다는 예술가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삶에 대한 열정과 세계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언어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깊은 사색은 너무나도 단조로운 삶을 살았던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흔든다. 그리고 그를 통한 여정을 통해 드러나는 아마데우의 흔적들은 그레고리우스의 내면에 숨어있는 여러 얼굴들 그가 잊고 지냈던 세계의 문을 열게 한다. 아마데우의 여러 페르소나가 자신인 것처럼. 그건 아마데우가 타인들이 봤던 자신과 내면의 자신이 다르고 그 다름을 글로 옮김으로써 표현한 세계를 통해 드러난다. 그레고리우스에게 따분함을 말했던 전 아내의 표현과 달리 그의 내면의 사유 역사 아마데우처럼 견고한 철학이 숨어 있다는 걸, 빛나는 열정이 있다는 걸 간과했다는 안타까움도 담아 있다. 어쩌면 그런 시선의 발단은 스스로에게 있지만 우리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


말이 있기 전 세상의 침묵.p560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가. 눈빛은 없었고 읽혀질 뿐이었다. 눈빛은 언제나 ‘해석된 눈빛’이었다. 해석된 눈빛만이 존재했다. p564


그러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날 때에는 이 여행이 언젠가는 끝이 나기는 할까.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할까.p384


몸이 굴욕적으로 뒤틀려 있고, 끝없는 고통의 노예가 된 사람에게는 평범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아픔이 있다. 이들은 육체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지내다가 어느 순간 다시 제 몸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사람들과 다르다. p386


이따금 나는 인간의 약점보다 ‘생각 없음’이 더 많은 잔인함을 초래한다고 생각한다.p387


사실은 내가 한달의 길이라는 혼란스러운 질문을 하면서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 이해하는데 1년이 걸렸다고 해야 옳다.p397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나 스스로에 대해 아는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지 스스로에게 물었노라고 말했다. p437


사실 사유는 둘째야.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시지. 시적인 사유와 사유하는 시가 존재하는 곳은 낙원일거야.p478


작가는 이 책에서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을 한다. 그레고리우스가 고대어를 공부했다는 것도 그렇고 새로운 단어를 익혀서 아마데우의 책을 스스로 이해하는 과정도 그렇다. 또 아마데우의 책 속에서 언어를 통해 표현된 그의 사유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는 아마데우라는 사람의 실체를 통해서 타인이 보는 나와 내 안의 나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먼지 보여준다. 결국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언어이지만 우리가 제대로 언어를 표현할 수 없을 때 나는 결국 존재하면서 존재 바깥의 인물로만 그려지게 된다. 사람들이 좇는 모습은 그 존재 밖의 허상일 뿐이다. 거기서 얻는 헛헛함이라니.


우리는 천박함으로 가득한 꾸며진 존재요, 쉬지 않고 움직이는 수은과 같은 영혼, 게다가 끝없이 흔들리는 요지경처럼 색과 형태가 변하는 감정을 지닌 존재들이 아닌가.p438


우린 어떻게 타인에게 보여지는가에 가치를 두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건 사실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로 표현된 사유, 절박하고도 분명한 목소리를 지닌 언어가 내 것이 되지 못했을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결코 자유롭지도 존재로서의 가치도 확인할 수 없다. 그레고리우스가 라틴어를 좋아했던 이유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말은 시가 되고 나서야 진정으로 사물에 빛을 비출 수가 있어. 변화하는 말의 빛 속에서 같은 사물도 아주 다르게 보이지.


리스본의 거리를 걸었다. 그레고리우스가 머물렀던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몰락한 귀족 같다는 포르투갈 사람들은 보통의 유럽사람들처럼 거만해 보이지 않았다. 살라자르의 독재 기간 축구와 파두로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지 않게 했고 교육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유하는 능력을 키우지 않았던 그 나라에 이제 서서히 변화가 몰려온다고 한다. 나는 다시 그 거리를 언젠가 걷고 싶다. 포르투갈어를 배워서 그들에게 포르투갈어로 인사하고 싶다. 봉 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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