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손가락이 휘어질 때 '어, 내 손가락이 이렇게 생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통증이 밀려오고 병원에 가서야 이른 퇴행성 관절염이 시작됐다는 걸 알았다. 평생을 내가 잘하고 줄곧 해왔던 일들은 손가락을 사용하는 일이었다. 붓을 든다든가, 구슬을 꿴다든가, 카메라를 든다든가, 컴퓨터 타자를 친다든가, 연필로 글씨를 쓴다든가, 그런 일들은 손가락을 써야하고 내 손가락은 나라는 사람을 증명하는 도구로 평생을 이용당했다. 조금은 무모하고 조금은 자신의 육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게다가 요샌 늦게 배운 빵만들기를 하며 반죽을 한답시고 매일 손을 써야한다. 그야말로 지독하고 자비심 없는 육체의 주인이다. 그런데 내가 내 몸의 주인이 맞기는 한 건가? 문득 미안해진다.
나이를 먹으면서 닳는 것이 무엇인지 알 거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조금씩 나의 닳아버린 구석구석을 확인한다. 너무 오래 써서 하얗게 빛이 바래거나 너무 많이 써서 너덜너덜해진 마음이라든가 오랫동안 사용했던 나무의 거스러미처럼 변해버린 발바닥과 발 뒤꿈치, 흘러내리는 것들이 모두 시간의 흐름을 드러내고 그 흐름을 온전히 닳는 모습으로 증거하고 있다. 해가 지는 붉은 노을의 교묘한 색처럼 인생의 후반기도 그렇게 갈 수 있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그럼에도 요즘 하얗게 눈이 내린 머리카락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며 아름답게 늙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면 잠깐씩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다만 안타까운 건 그들이 보이는 여유가 경제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라는 팩트다.
닳은 것들이 좋은 건 모서리다. 모서리가 둥글고 부드러워 웬만해선 상처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닳고 있으면서도 더 뾰족하고 더 날카로운 사람들도 많다. 그들이 일으키는 분쟁들을 많이 봤다. 그럴 땐 슬프다. 아름답고 둥글고 부드러움은 환상일까. 요즘 유튜브에서 젊은, 그리고 패기있는, 독립성 강한 여성 유튜버를 만난다. 그들이 일궈 가는 일상의 풍성함은 어쩌면 단단하게 만들어지기까지의 아픈 사연들도 있을지 모르겠고 풍요로운 뒷배경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알 수 있는 분명한 건 그들에게 예상치 못한 상처를 주는 댓글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나와 전혀 상관 없는 무례한 세상의 일부와 만나 외면하는 법을 견뎌내는 법을 배우고 있는 그들은 아름답고 둥글고 부드럽게 갈릴 것이란 희망을 갖는다.
나는 지금 분명 닳고 있다. 내가 그동안 끌고 왔던 몸뚱이와 생이 뾰족뾰족했다면 이젠 부드럽게, 둥글게 사람들을 품으며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요 며칠 긴장하는 일을 마주했을 때의 나는 여전히 뾰족하고 신경질적이며 예민하다. 그렇다면 다시 기대해 보자. 아직은 닳고 닳아서 모서리가 없어진 때가 아니라고. 그래서 여전히 개성을 드러내고,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며 내일을 꿈 꿀 수 있다고. 어차피 시간이란 놈은 가만히 있어도 나를 깎고 닳게 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