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우체통

독서일기 5

by 이성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행복이라는 건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넣을 수 없는 거야. 난 평생 누군가를 바라보다 더 깊이 사랑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거야.”/ 영화<태풍이 지나가고>


살면서 사람들이 꿈 꾸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현실은 늘 행복과 멀기만 하다.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한 순간에도 상대방 입술의 온기가 남아있을 때조차 상대의 배신이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있다. 현실은 언제나 전쟁처럼 치열한 생존의 문제를 던지고 있고 그 질문 속에서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게 실제의 우리들 모습이다.


‘나는 인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하고, 착오이고, 무한한 고통이며 비신(非-神)의 악의가 만들어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명품이라고 그에게 말했다.’545


나는 때로 그토록 힘겹게 살아왔던 삶의 순간순간이 너무나 허망하며 관계의 부질없음에 우울할 때가 있다. 공들여 맺어왔던 관계와 시간이 눈앞에서 허무하게 무너지게 될 때 그 어떤 관계에 대해서도 삶에 들여왔던 노력도 내가 알고 있던 사실과 달라서 주저앉고 싶어진다. 그때 나는 신에게 묻는다. 도대체 당신의 뜻은 어디 있느냐고. 도처에서 우린 무능하고 태만한 신을 만날 뿐이다. 여전히 세상은 전쟁과 가난으로 점철되고 일부에게 지나친 부가 편중되어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어가고 있다. 부조리한 상황을 매일 만나고 그리고 그것이 어느새 정도인 것처럼, 거짓이 사람을 현혹하고 진실은 외면 받는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일까. 그 안에서 나의 존재는 무엇일까.


세 편의 소설 중 앞의 두 편의 소설은 사실상 거짓이다. 소설 속에 또 다른 허구의 글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3편의 소설이 진실이란 근거도 없다. 소설을 읽다보면 허구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읽다가 어느 순간 이것은 허구다,라는 단서를 통해 인식하게 된다. 그럼에도 각각의 소설은 그 나름의 얼개를 갖고 흥미를 자아낸다. 사실 우리의 삶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증명하기도 전에 우리는 순식간에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흡사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알 수 없는 상태,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의 상태이다. <장자>의 ‘제물론’에 의하면 장자는 “언젠가 내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는데 내 스스로 아주 기분이 좋아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더라. 이윽고 잠을 깨니 틀림없는 인간 나였다. 도대체 인간인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나비가 꿈에 인간인 나로 변해 있는 것일까. 인간 장주와 나비와는 분명코 구별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만물의 변화인 물화(物化)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꿈도 현실도 죽음도 삶도 구별이 없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생각으로 느끼고 하는 것은 한낱 만물의 변화에 불과한 것이라는 뜻이다. 허구인 소설 속의 또 다른 허구는 삶 안에서 거짓과 진실이 교묘하게 직조되어 우리 삶의 진실 혹은 거짓 중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을 가져온다. 영화 메트릭스의 데이터화된 것이 나의 실체일지도 모를 질문들, 암호화된 것들 속에서 나는 과연 누구일까. 루카스와 클라우스는 알파벳 철자의 순서만 바꾸면 같은 단어다. 두 사람은 ‘나’라는 사람의 두 개의 얼굴일 수도 있으며 두 명의 형제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세 편의 이야기가 물리고 물리면서 어느 하나도 거짓이 아닌 것 같고 그 무엇도 진실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세 개의 이야기는 서술자의 입장에서는 거짓일 수도 진실일 수도 있다. 거짓과 같은 내면의 간절한 바람은 어쩌면 사실에 가장 가까운 진실일지도 모른다. 역설적이게도. 무엇보다 이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드러내고 있는 존재에 대한 몰입이다. 생존의 문제는 실존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은 한 개인이 전쟁과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수많은 주검을 목격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을 경험하는 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증거해야만 하는 비극적 현실이기도 하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망명 후의 여공 시절에도 공장에서 일하며 머리로는 시를 짓곤했다. 계의 리듬에 맞춰서 작품이 끝났을 때의 기분은 허탈했다. 완성된 작품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쓰는 행위를 정신분석과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 거기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다. 쓰면 쓸수록 병은 깊어진다. 쓴다는 것은 자살 행위다. 나는 쓰는 것 이외에는 흥미가 없다. 나는 작품이 출판되지 못하더라도 계속 쓸 것이다. 쓰지 않으면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 쓰지 않으면 따분하다”고 밝혔다. 이 이야기는 작품 속에서도 드러난다. 인생 자체가 책을 쓰는 행위가 같다고.


“ 모든 인간은 한 권을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 것 없는 책인거,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 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갈 뿐이네.”/p302


소설 속의 대사처럼, 작가의 말처럼 우린 각자 이해할 수 없는 이 삶의 현장을 매일매일 한 권 속에 있는 페이지처럼 메꿔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 삶은 활자화된 순간 끔찍한 환상 같이 느껴진다.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짜 맞추기엔 너무나도 황당한 얼개들의 이야기 집합체가 현실의 삶이다. 나는 그 속에서 꿈꾼다. 이 끔찍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을 찾아 나선다. 나는 용의주도해야 하며 거짓말에 능숙하고 내가 위험에 빠지기 전에 날 위협하는 인물을 응징해야 한다. 고통에 적응하고 그 고통을 이겨내야 하며 스스로를 방어할 줄 알아야 하고 타인을 적당히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감성에 쉽게 휘둘려서는 안 되고 어른들이 내미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서도 안 된다. 나는 순식간에 유약해져서 다시 타인들에게 휘둘리게 되고 고통에 그대로 노출되며 쉽게 허물어진다. <비밀노트>는 어쩌면 생존을 위한 자기 몸부림을 위해 스스로 강해져야 하는 강한 바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나는 1편 <비밀노트>를 읽으며 묘한 흥분과 즐거움을 느꼈다. 작고 상처받기 쉬운 어렸을 때의 나를 떠올렸다. 그렇게 야무지지 않았던 거 같았다. 아버지는 부재했고 엄마는 늘 우울했다. 엄마는 나와 동생, 둘과 함께 죽으려고 했다. 하지만 질긴 게 생명이라서 우린 살았고 오랜 엄마의 우울도 거둬진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병이 들었던 거 같다. 매사에 자신이 없었고 어디 가서도 주변에 머물렀다. 내 목소리를 내는 게 두려웠다. 그리고 환경이 바뀌었고 어렵게 책이란 도피처를 발견했다. 할머니에게 맡겨진 쌍둥이 형제가 스스로 글을 깨우치고 책을 읽고 현실의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부분처럼 나 역시 책을 읽고 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그림을 그리며 자기의 이야기를 지어냈던 나의 어린 시절과 너무나 흡사하다. 물론 나는 그들처럼 영악하고도 위험하게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우울함을 감추고 나로서 살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어쩌면 <비밀노트>는 어린 시절 강한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많은 청소년들의 바람인지도 모른다. 나의 이야기였고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였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성장한 후에 또 다시 밀려드는 우울감은 어쩔 수가 없다. 현실은 혼자이기 때문이다. 혼자 남겨진 루카스처럼.


이 책의 제목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란 것에서 우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거짓말이란 존재하는 것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거짓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사유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하지만 실재로 우리 삶엔 얼마나 많은 거짓과 거짓말이 난무하는가. 거짓말이나 거짓 대상, 거짓 판단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유의 대상도 존재의 대상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사유에 대상에 놓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실체 없는 가치들은 우리는 ‘철학’의 범주에서 사유하고 고민하다. 실제로 헤겔은 “순수한 존재는 무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존재와 무의 진리는 한 쪽이 다른 쪽으로 즉시 소실되는 운동이다.”라고 말한다. 존재와 무는 모순을 사이에 두고 서로 하나이며, 바로 이렇기에 존재는 순수한 무의 상태이다. 없는 것은 우리가 인지할 수 없다. 거짓으로 존재하는 것조차 실재하는 것이다. 마치 1편 <비밀 편지>와 2편 <타인의 증거>가 거짓말이란 것을 우리가 알면서도 한 인간이 수십 년의 세월을 버텨온 시간의 증거로 남아있다는 것을 읽는 독자는 인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3편의 <50년의 고독>까지 진실인지 거짓인지 갸웃거리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재조차도 실재하는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장자>의 호접몽처럼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알 수 없듯 현실이 거짓인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가상의 공간, 물리적인 또 다른 공간 속에 있는 내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이미 텍스트에서도 드러난다. 텍스트화된 공간은 현재와 가상을 넘나들면서 내가 살고 있는 현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내가 이곳에 실재로 존재하는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런 것들은 문자에서 영상화되고 우리는 스스로 묻는다. 희망은 어쩌면 여기에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도 언젠가는 끝나리라.’ 전쟁을 겪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던 저자에게는 그 순간순간이 견뎌내는 고통을 극족해 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이 루카스의 존재의 증거이겠군요.” p377


자살을 선택한 루카스의 존재는 그가 남긴 글 속에 남아있다. 그의 글은 사실 거짓이다. 그럼에도 루카스의 존재를 가장 현저하게 드러내주는 증거이다. 우리 인생은 ‘가장 슬픈 책들보다도 더 슬픈 인생이 있는 법이니까요’(p394)라는 진술처럼 허구 속에 우리가 숨겨놓은 진실과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각의 책을 써내려가고 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이지만 실제로 자신이 주인공임을 인지하고 사는 사람은 드물다. 나의 삶의 흔적이 나를 증거하듯이 나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의 증거는 나의 존재에서야 비롯된다.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나는 한낱 몸짓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가 내 이름을 불러주어서야 나는 그의 꽃이 되었’듯이 우리의 증거는 타인의 인식에서부터 비롯되고 타인의 증거는 나의 인식이 그에게로 뻗었을 때에야 가능하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강하게 얽혀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각박할수록 혼자서 동굴에 숨고 싶은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그렇다. 나의 존재와 타인의 증거는 강하게 얽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묘지에 간다. 나는 Clus라는 이름이 새겨진 십자가를 바라보며 Luca라는 이름이 새겨진 다른 십자가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루카스든 클라우스든 그들이 하나이든 둘이든 중요하지 않다. 따로 서로 다른 곳에서 고독하고도 고통스런 삶을 살았던 그, 혹은 그들은 전쟁처럼 혹독한 현실에서 살아남는 방법으로 그만의 삶을 선택했고 그것이 그들이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을 증명하는 서로에게서 죽음의 가능성은 삶의 가능성과도 같은 의미이기도 했다. 전쟁의 포성은 끝나고 군화발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음에도 살아야 할 명분을 갖지 못한 것은 상대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아서다. 그리고 하나가 사라지자 나머지 하나도 살아야 할 아무 의미를 찾지 못한다. 세상은 그들이 기록한 <비밀 노트> 속의 세계보다 더 혹독하고 처참하다. 우리는 가상세계와도 같은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 앨리스처럼 우리는 어서 꿈에서 깨어날 일이다. ‘기차’의 기적이 울리면 그리고 기차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면 꿈에서 개어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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