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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a J Dec 03. 2023

처음으로 내 안의 나를 만나다

단순히 취업을 위해 선택했던 전공과목이 적성에 전혀 맞지 않았다.

학과에서나 동아리에서나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뭐 하나 만족스럽지 못했었고

집안에서나 집 밖에서나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거나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는 마음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들만 계속되었다.


왜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적대적이지?
난 남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먼저 시비를 걸지도 않았어.
그들에게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을 한 적도 없어.
그런데 왜 사람들은 나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가 있지?
왜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 거지?
왜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없는 걸까?


사람들을 통해 반사되어 오는 내 존재의 가벼움에 더없이 우울해져만 갔던 20대의 시작


지금 되돌아간다면 정말 열심히 적극적으로 다시 살아보고 싶은 아름다운 청춘 20살의 나이


그렇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스스로를 음지에 가두어 두어 그 아름다움을 꽃피워 보지 못했던

암울하고 바보스러웠던 지금 되돌아봐도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로만 가득한

하루하루를 그렇게 시간을 죽이며 나를 죽이며 살아온 날들의 연속이었다.


학교에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들어 지자 당연히 학교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고등학교와 대학과의 차이첨이 전혀 없었던 학교생활은

대학생이 된 것에 대한 특별한 흥미를 내게 부여해 주지 못했었다.


학교에 안 가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부모님과 6남매가 방 3개의 좁은 빌라에 함께 옹기종기 모여 사느라

나만의 공간 같은 것은 상상초차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으로부터 특히나 엄마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는 듣기조차도 싫었다.


학교를 가기 위해 항상 강남역에서 환승을 해야 했었다.

그랬기에 강남역에 영어회화를 배우기 위한 어학원에 꾸준히 다니고 있었다.

학교는 가지 않았지만 강남역에 위치한 어학원에는 꾸준히 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학원에서 알게 된 오빠를 통해 그의 친구들과 주변인들을 알게 되었다.

그 오빠도 그랬지만 친구들도 모두 부유하게 잘 사는 집안의 아픈 손가락들이었다.


학원 수업이 끝나면 그 오빠와 함께 서초동의 한 당구장으로 가서 시간을 보냈다.

내가 당구를 친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곳에서 그 오빠와 친구들이 당구 치는 동안 기다리며

그렇게 나의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당구장의 사장님도 역시 그 오빠와 친구들과 비슷한 부류였다.

게다가 그는 안색이 청색빛이 돌았다.

알코올중독자라고 했다.

소주를 너무나 마셔서 건강에 위험신호를 받고 있지만 술 마시는 것을 끊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난 그들의 세상을 엿보면서 이중 생활을 상상했었다.

낮에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밤이 되면 오토바이 폭주족들과 어울리고

술에 취해 사는 알코올중독자의 생활을 떠올려보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겁이 엄청 많았던 나였기에 실제로 시도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혼자서 공상을 하며 그렇게 아름다웠던 내 20살을 낭비해 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그 오빠와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하철에서부터 누군가가 나를 따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지하철을 타고 마을버스로 갈아타는데 역시나 그 사람은 나를 따라왔다.

집 앞 마을버스에서 내렸을 때 그 사람과 마주했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겁에 질려 있었다.
여자였다.


자신의 손등에 있는 담배빵으로 만들어진 상처를 보여주었다.

자신은 그 오빠의 예전 여자친구라고 하였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는데

진심이 없던 그 사람의 이별 통보로 인해 자살까지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겁이 많았던 나에겐 그 오빠에 대한 실망보다는 그 여자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었다.

나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겁을 먹고 있었다.


이후,

난 그 오빠를 멀리 했다.

만나지 않으려고 하자 꾸준히 연락을 하며 한 번만 만나달라고 하였다.

이후 한두 면 더 만난 후 그와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다.


다행히도 깊은 사랑 같은 건 몰랐던 나이었었고

그와는 그냥 가벼운 오빠 동생사이로 지냈던 시절이라 만남을 정리하는 것이 생각보다 수월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학원을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파트타임을 찾기 시작했다.


롯데월드의 전시장에서 안내역할을 하는 일을 잠시동안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마이크를 들고 관람객을 향해 전시물 소개 안내 멘트를 했다.

같이 파트타임을 했던 동료를 통해 내레이터 모델이란 직업을 알게 되었다.

전시장에서 유니폼을 입고 서서 마이크를 들고서는 상품에 대한 안내 멘트를 하는 직업이었다.


나에게는 또 다른 신세계였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또 다른 나를 깨우는 듯했다.


전문 내레이터 모델이 되기 위해 학원에 등록했었고

그곳을 수료한 후 한 3년 정도 행사장에서 나레이터 모델로 나의 20대를 보냈다.


이렇게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찾아서

그 일을 위해 집중하며 정신없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가졌던 사람들에 대한 감정은 사라진 듯했다.

지금 되돌아보니 이것이 처음으로 나를 발견하고 나에게 집중했던 시간이었다.

학원을 수료하고 행사장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문득 대학 졸업장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휴학을 했던 것도 아니었고 일방적으로 학교를 나가지 않고 있어서 학사경고를 받고 있었다.


졸업장을 위해 부족한 학점을 채우기 위해 계절학기를 들었다.  

그렇게 학점만을 채운 후 다행히 졸업장은 손에 쥐었다.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한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래도 내 대학졸업장과 학위를 바탕으로 다른 전공에 이후에 편입도 할 수 있었고

캐나다 이민 때도 내가 가지고 있는 학위를 이민점수에 반영할 수 있었으니

졸업장을 목표로 노력한 것은 당시에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 글을 적으며 나의 과거 내 엄마에 대한 글을 써가며 나 자신 스스로가 깜짝 놀랐다.


지금 나의 아이들은 내 목소리를 듣는 것을 거북하게 생각한다.


내가 자랐던 가정환경과는 전혀 다른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나를 방임했던 우리 부모님과는 달리 난 내 아이들에게 올인하는 삶을 지금껏 살아왔건만

엄마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관계는 어쩜 이리 비슷할 수가 있을까?

이 점에 대해 다음글에 더 생각하고 이야기를 풀어봐야겠다.


내시선으로 봤을 때 온라인 세상에 중독이 되어 완전히 정신이 나가서 살고 있는 아이들이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깨어나는 그 순간을 난 기다리기로 했다.


내가 나 자신을 깨트리고 세상에 건강하게 발을 디뎠듯이

내 아이들도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믿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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