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런 아름다움
“이걸 잘 그리게 되면, 평생 그림을 그리고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중학교 때 일기장 한 켠에, 시점이나 비율이 어긋나게 삐뚤빼뚤 그린 자전거와 숲길 그림 옆 모퉁이에 이렇게 써 놓았었다. 그때 그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 정말, 진짜여서, 수많은 일기 중에서도 그 문장을 쓸 때의 간절한 기분이 기억난다.
나는 보기에 좋은 것을 좋아한다. 미각도, 후각도, 촉각도 다른 감각들은 둔하고 뭐 어째도 별 상관없는데, 시각적인 것에는 주변에서도 예민하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생각해 보면 유치원 때부터도 자유시간엔 잘 그리지는 못해도 언제나 그림을 그렸다. 그때 내 눈에 그림을 잘 그리던 친구를 동경하고, 같이 그리자며 알려달라고 조르기도 했었다.
그런 나에게 오늘은 예견된 운수 좋은 날이다. 시작부터 신나는 날이다.
같이 디자인을 전공한 Y와 서로 그림을 그려주러 화실에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내 생일은 3월, Y의 생일은 4월인데, 기념해 그 즈음 서로 그림을 그려주곤 한다. 근데 이건 솔직히 내게 유리한 불공정 거래다. Y가 내가 그려준 그림을 그냥 추억 정도로 생각한다면, 나는 Y가 그린 그림의 슈퍼슈퍼팬이기 때문이다.
Y의 그림이 왜 특별한지 쓰려고 하니 왠지 타자가 엉킨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어떤 평가보다 진실된 미간을 찌푸리는 그 느낌이랄까. 내 부족한 글 실력으로 Y 그림의 고유함을 잘 담아낼 자신이 없다. 사실 잘 그리는 친구들은 많다. 널렸다. 나름 나도 우리 미술학원에서는 주력 상품이었는데, 디자인대에 가자마자 내 그림을 잘 그린다고 어디 명함도 못 내밀었다. 요즘까지도 가끔 같이 그림을 그리러 가는 디자인대 동기는 언급한 Y와 J가 있는데, 둘 다 날다, 기는 한다는 애들 사이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예쁜 걸 잘 그려내는 애들이다. 그런데 Y에게는 그중에서도 뭔가 특별함이 있다.
Y는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 2D 그림이나, 제도 시간에 하던 일정한 선 연습마저 Y가 하면 뭔가 달라 보였다. 내가 질색팔색하며 "왜 내가 공디를 왔나..." 현실 자각 타임을 가지게 하던 디자인 제품 목업도 Y는 마지막 사포질까지 뽀얗게 묵묵히 만들곤 했다. 누군가는 칭찬한답시고 “야, 너는 목업 가게 차려도 성공하겠다.”라고 한마디씩 했다. 그때마다 나는 속으로 “잘 몰라서 그러시는데, 얘는 다 잘해요.”라고 생각했다.
Y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능력은 이 글에 꽉꽉 담아 찬양을 받아도 마땅하지만, Y의 그림을 더 특별하게 만드는 건 Y의 태도다. Y는 그림을 꼭 소중하고 조심스러운 어떤 것을 대하듯이 한다. 꼭 산달을 기다리는 엄마처럼... 혹여 잘못될까, 이게 이 그림에 맞을까 점 하나를 찍을 때도 신중하다. 그래서 Y가 완성한 그림을 집어 들 땐 왠지 갓 출산한 아이를 흰 천에 감싸 혹시 숨 쉬기는 편안한가 조심스러워하며 안듯 해야 할 것 같다.
아마 Y는 이런 자신의 태도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스스로를 더 괴롭혔을지 모른다. ‘나 잘났지’ 하고 이 색 저 색으로 자기 주장이 강하던 디자인과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총천연색 그림들 사이에서, Y는 혹여 자신의 진행이 과한 것은 아닌지 늘 의심했다. 저 정도 그리면 “나 좀 그려!” 하고 쓱쓱 그려낼 법도 한데...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런 자기 의심 덕에 Y의 그림은 대감집 4대 독자 도련님 같은, 누구도 함부러 대할 수 없는 조심성까지 품게 되었다.
요즘은 시들해진 것 같지만, 한동안 한국에서 ‘자존감’을 높이는 게 붐처럼 느껴졌다. 어디를 가도 자존감을 높이는 게 전 국민의 과제인 것처럼, 서점에는 새로 나온 심리 서적의 태반이 ‘자존감’을 타이틀로 걸고 따로 매대까지 섭렵했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조금은 자신을 의심하고 맞는지 돌아보는 태도가, 누군가는 ‘자존감을 챙기라’고 뭐라고 할 태도가, 사실 자신이 만들고 있는 결과물에 대한 존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크게 보면 자신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조심스러운 아름다움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