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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러너

Slow runner, slow learner

by Helen J

올해 1월 1일부터 피트니스에 다시 가기 시작했다. 마른 비만. 마른 ‘비! 만!’이라니. 연말에 보건소에서 대사증후군 검사를 했는데, 체지방량에 놀라 이제 운동을 안 하면 안 되겠구나 싶었다.


“회원님, 그렇게 천천히 하시면 안 하느니만 못해요.”

요즘 운동을 가면 자꾸 눈치가 보인다. 트레이너 선생님들이 와서 좀 더 열심히 하라고 한마디씩 하고 가신다. ‘오늘 운동하러 온 것 자체가 내 하루의 최대 업적인데...’라고 변명도 못 하고, 그 트레이너 선생님이 옆을 지나가실 때면 눈치껏 속도를 높인다. 내가 슬쩍 봐도, 주변에서 운동하는 분들의 열심열심 바이브에 비해 나는 좀 맥아리가 없다.


숨이 차면 큰일 날까 봐 천천-히, 내 체력의 40%만 써서 달리는 Slow runner.

주변에서 볼 때는 하찮아 보일지라도, 이렇게 달리는 것도 꽤 장점이 많다. 첫째, 일단 힘들지 않다. 둘째, 사부작사부작 노래를 배경음악 삼아 달리면 체력을 극한으로 몰아붙였을 때 나오는 도파민인 runner’s high에 기대지 않아도 늘 산뜻하게 뛸 수 있다. 마지막으로, 힘들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 날 나를 설득해 운동하러 다시 오기가 쉽다.


꼭 운동뿐만 아니라, 난 꾸준히 슬로우한 인간이다.

꼭 좀 어려운 것은 남겨두거나 안 할 방법을 찾으려다 지각 인생을 살아왔다. 일할 때는 풀 악셀을 밟긴 하지만, 특히 공부할 때는 더욱 그렇다. 학창 시절엔 수학을, 디자인할 땐 컴퓨터 그래픽을, 유학생활 할 때는 ‘정신분석이 한 사람 마음을 이해하는 건데, 빨리 되겠어요?’라면서 간혹 재촉하는 교수님들을 되려 위로하는 대담성을 보였었다. “남들보다 늦으면 남들보다 10년 더 살죠, 뭐.” 이렇게 넉살을 부리면서.


보스턴에 있을 때, 매년 최고의 축제 같았던 날은 현지 날씨상 이른 봄보다는 겨울처럼 느껴지는 4월의 보스턴 마라톤 날이었다. 사람들은 각자 레모네이드, 쿠키, 음료 등 즐길 것들을 가지고 마라톤 루트 옆으로 나와 지나가는 러너들에게 환호를 보낸다. 그 응원 소리는 이미 상위권은 결승 전에 다 도착하고 나서 경기의 마무리에 가까워질수록 커진다. 마치 지금껏 기다리던 록스타가 나타난 것처럼... 1,2등 등수나 기록과는 상관없이 후발 그룹 러너들은 그런 관중들의 환호에 호응하며 마지막 질주를 한다. 끝까지 자신만의 레이스를 하는모습과 그 순간을 같이하고자 응원하는 분위기에 감동받아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에서 함께 울기도 한다.


마지막 러너를 결승선에서 모두 응원하며 기다려주는 마라톤처럼, 인생도 그랬으면 좋겠다. 조금 천천히 가고, 전투적으로 하지 않고, 밍기적밍기적 가도 결국 같은 죽음이라는 결승선에서 삶의 모든 기록을 축하해 주었으면 좋겠다.


이상, 아침에 운동 가기 전 슬로우 러너의 변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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