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로에게 다정한 시간

각자의 체력에서 서로의 힘으로

by Helen J

유학 시절, 학교 가는 길에 T에서 두 정거장쯤 먼저 내리면 Coolidge Corner라는, 예쁜 카페와 서점이 있는 작은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보통 나를 두 정거장이나 걷게 만든 건 Trader Joe's였다.


요즘은 더 품목이 다양해진 것 같지만 냉동 비빔밥이나 냉동 파전 같은 신박한 한국음식도 있고 무엇보다 시즌마다 나오는 이런저런 기획상품은 내 발길을 끌었다. 특히 가을 때 메인주에서 나온 메이플시럽으로 만든 단풍모양 메이플사탕이나 요즘 같은 이스터땐 토끼모양 초콜릿은 그 깜찍함에 안 살 수가 없다! 4계절이 뚜렷한 보스턴이지만 이런 매대 상품을 통해서도 계절마다 즐길 것들을 만나곤 했다.

한국에 와서도 가끔 요즘 시즌제품은 뭐가 있는지 검색해 보는데, 그래선지 내 알고리즘에 자주 뜬 유명인사가 있다. 요즘 나의 시즌에 Trader Joe's 가 알고리즘으로 이어준 인사, 바로 Lois Kim이다.




지난 일요일, ‘다정함도 체력에서 나옵니다’의 저자 Lois Kim과 함께한 북토크는 책 제목처럼 다정하고도 단단한 시간이었다. 한껏 봄비가 내린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신박하게 만나자마자 준비운동을 하며 통성명을 하고 올림픽공원을 함께 달렸다. 서로의 목소리보다 먼저 들린 건 서로의 숨찬 호흡이었다.


나는 전날 여러 가지 일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몸도 좋지 않았지만, 내 안의 무거운 감정과 주제들은 달리는 동안 점차 멀어져 갔다. 옆사람의 부지런한 발소리, 꽃봉오리, 개나리의 노란색, 그날이 콘서트 날인지 아이브 공연에 줄 서 있던 꼬마들의 활기찬 기운 같은 것들이 내 안의 무거움을 조금씩 밀어냈다. 삶의 여러 주제와 바쁜 일정에 매몰되기엔, 달리며 함께 만들고 지나치는 풍경이 너무 예쁜 봄날이었다.


서로의 숨소리에 익숙해질 무렵, 우리는 3.5km의 달리기를 마쳤다.



이후, 차 한 잔을 마시며 책 이야기를 나눴다.
“______도 체력에서 나옵니다”라는 문장을 각자의 삶에 빗대어 만들어 보며, 자연스럽게 일상과 고민을 꺼내놓았다.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이어간 대화에서는, 말하는 것보다 듣는 일이 더 크고 깊게 다가왔다.


아마도 우리가 다른 공간에서 마주쳤다면, 별일 없는 줄 알고 조용히 지나쳤을 서로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에게 있었던 삶의 여러 주제들과 질문들을 마주하고 듣는 일은 낯설지만 큰 힘이 되었다. 무심코 지나치던 나무가 봄이라며 가지를 뚫고 꽃을 피우듯, 무심히 지나쳤던 우리도 각자의 자리에서 삶의 꽃을 피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에서도 이처럼 더 생생하게 꽃피려는 모든 노력은 각자 수고스러움을 머금고 있다. 우리는 이 수고스러움을 잠시 멈추고 서로의 꽃망울을 바라보았다.




난 삶에서 어려움을 마주할 때, 무언가 큰 마음의 지지대가 기적처럼 나타나주길 얼마나 바랐던가. 유학생활 초기, '가족과 친구들 익숙한 언어'라는 모든 그 '나의 일부라 생각했던 나의 세계'를 떠나 새 공간에 섰을 때 나는 오랜 기간 무기력했다. '아 내가 한국이면 날아다녔을 텐데!"라 생각하며 보스턴이 서울의 옆동네여서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런 일상을 꿈처럼 바랬다. 그렇게 되면 난 더 활기차질 텐데..


그러나 Lois Kim은 그 모든 안정적 삶의 기반이 있을 때, 오히려 이를 버리고 가족이 닿지 않는 학교에 혼자 석사생활을 선택적으로 시작하며 '나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이란 새 시작을 했던 그런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다. 저 사람이 가진 그 에너지의 원천은 뭘까. 저 사람이란 세계의 단단한 기반이 된 건 뭘까. Lois Kim은 그 단단한 기반은 체력이었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몸의 힘을 믿고 아침 달리기부터, 일상 속 작은 시간에도 움직이는 일. 어쩌면 우리 삶을 일으키는 그 큰 일은 그 작아 보이는 행동부터 시작되는지 모른다. 체력을 기르는 일은 내안에 이미 존재하는 생명력을 지지대 삼아, 스스로의 삶을 세우겠다는 이정표를 세우는 일 일지 모른다.




타인의 리듬에 맞추어 함께 달리는 일, 처음 만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일—모두 겉보기엔 쉬워 보여도, 결국 그런 다정함은 일요일 아침 황금시간, 우리를 일으켜 이곳에 모은, 그 체력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마음에 우울감이 찾아왔을 때 새벽 달리기부터 시작하며 삶을 세웠다는 한 분의 간증 같은 진심이 내 마음을 울렸다. 가끔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던 내 안에서,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에너지—그 몸을 움직이는 용기 역시 그런 체력이었다.


다정함은 말의 온기만으로 생기지 않는다. 함께 숨을 고르고, 기다려주고, 끝까지 들어주는 지구력 속에서 피어난다.

일상의 페이스를 잠시 늦추고, 서로의 체력을 나누며 함께 견고하게 연결된 아침이었다.



링크: 도서 [다정함도 체력에서 나옵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5965081

keyword
작가의 이전글쉘 위 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