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언니들과 당일치기 속초여행을 갔었다. 유명한 물곰탕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언니들과 대화했다. 언니들에게 말했다. "얼마 전에 사주를 봤어. 그런데 나는 그냥 뭐든지 열심히 하는 사람이지 타고나게 뭘 잘하는 사람은 아니래. 꼭 교육업무를 안 했어도 교육업무 했을 때와 비슷한 수준의 인정은 받았을 거래.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인데 그냥 뭐든 열심히 하는 성격을 타고난 거래" 내 이야기를 들은 셋째 언니가 대답했다. "난 그래도 나한테 천재성이 있다고 믿으면서 살련다"
깜짝 놀랐다. 언니가 말한 그 문장은 오래전에 트위터 계정을 만들면서 내가 계정 프로필에 썼던 글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다. 피는 못 속인다고 자매라서 생각이 비슷한가 싶었다. 한편으로는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는 아직도 저런 생각을 하고 사는데, 나이 어린 내가 너무 일찍 현실과 타협했나 싶기도 했다. 또 전혀 반대로 내가 언니보다 더 일찍 철이 든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사실 내가 타고난 천재가 아닌 것은 세상에 천재라는 족속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학교 숙제로 쓴 붓글씨를 보고 아버지가 놀란 표정으로 칭찬해 주셨을 때는 잠깐 동안 내가 천재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나는 성적도 특출 나지 않았고 점수로 평가되지 못하는 다른 분야에서도 약간 눈길이 가는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을 뿐 탁월하지는 않았다. 공부도 약간 잘했고, 노래도 약간 잘했고, 그림도 약간 잘 그렸고, 글도 약간 잘 썼다.
그 약간이란 것이 희망고문의 고약한 씨앗이었을까. 꽤 오랫동안 나도 언니처럼 내게 숨겨진 천재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음악회나 전시회를 기웃거렸고 종종 글도 끄적거렸다. 관심이 가고 좋아해서였을 수도 있었지만 운명적이고 치명적인 자극이 잠재된 천재성을 폭발시켜 주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50년 넘게 살아온 지금까지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내가 우러러보는 멋진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아니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심지어 나보다 어린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세상도 바뀌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하다. 내가 가진 어설픈 지식과 경험은 명함도 못 내민다. 어쭙잖게 아는 체 했다가는 바로 깨진다. 갑자기 내가 겸손해진 것이 아니다. 없던 겸손이 하루아침에 생겨날 리 없지 않은가.
나는 이제 기꺼이 뒷방 늙은이가 되고자 한다. 내가 가진 재능으로 세상에 작은 것이라도 기여하고자 했던 것은 내 욕심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슬프지 않다. 다만 비겁함과 게으름의 합리화인 것 같아서 약간 부끄럽기는 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의 능력은 부족하고 열정조차 사그라들고 있으니 말이다.
나보다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제발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 주기만 바랄 뿐이다. 그러면 나는 기꺼이 뒤로 물러서서 열렬히 응원해 줄 용의가 있다. 그 응원에 대한 대가로 매일 아메리카노 한 잔 정도는 부담 없이 마실 수 있고, 여름에는 마음에 드는 리넨 셔츠 두어 장 사는 사치를 누릴 수 있고, 겨울에는 난로에 연료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살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큰 병이 아니라면 병원 가기 부담스럽지 않았으면 좋겠고, 가끔 좋아하는 사람에게 밥 한 끼 사줄 정도의 여유만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