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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Mar 08. 2023

매뉴얼 만세

스타벅스에서 사고 친 날


3일째 동네 스타벅스로 출근 중이다.


오늘은 왠지 커피를 많이 마시게 될 것 같아서 평소와 다르게 그란데 사이즈로 주문을 했다. 무거운 노트북가방을 어깨에 맨 채 큰 사이즈 커피가 올려진 쟁반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가 빈자리를 찾아 둘러보았지만 빈자리 찾기 하늘의 별따기. 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겨우 구석진 곳에 자리가 하나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몸을 틀어 방향을 바순간! 위태롭게 쟁반 위에서 곡예를 하던 커피가 결국 쟁반에서 미끄러지더니 바닥을 향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2층에는 따로 상주하는 직원이 없었고 어마어마한 양의 커피가 쏟아졌으니 나 혼자서 대충 휴지로 닦아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사고현장을 그대로 둔 채 직원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다급히 1층으로 내려갔다.


카운터에서 내 커피 주문을 받아주었던 여직원은 바로 나를 따라 2층으로 올라왔다. 그녀는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확인한 뒤 재빠르게 청소기구실에서 대걸레를 가지고 나와 쓱싹쓱싹 바닥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아직 물기가 덜 마른 바닥 위에 미끄러움을 알리는 작은 입식 표지판을  세다. 사고가 벌어진 지 채 2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상황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2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침착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문제해결 능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거지? 교육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일까? 미끄럼 조심 표지판을 세우는 것은 아마 매뉴얼에 있는 지침이겠지?'


요즘은 매뉴얼대로 하는 서비스를 판에 박힌 뻔한 서비스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남들에게도 다 똑같이 제공되는 서비스가 아니라 나만이 혜택을 보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고객들의 기대를 뛰어넘 감동을 줄 수 있다고도 이야기한다. 실제 서비스교육에서는 고객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문제를 해결하지 말고 먼저 고객의 감정부터 공감해 주라고 가르치기도 한다. 물론 그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신속하지도 않고 정확하지 않은 친절보다는 조금 덜 친절하더라도 신속하고 정확하게 일 처리를 해 주는 서비스가 더 좋.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을 때 공감하는 말만 길게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막상 내 문제 해결해 주지 못하면 감동은 커녕 울화통이 터진다.


내 사고처리를 해 주었던 여직원은 금속테 안경을 써서 그런지 인상이 약간 차가웠다. 그리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짓거나 친절한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저 빠르고 정확하게 사고를 뒤처리해 주었을 뿐이다. 만약 그녀가 나를 향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객님 놀라셨죠~"라고 말하면서 커피가 쏟아진 바닥을 어설프게 닦아 바닥에 물기 남겨 두었다면 어땠을까? 내 마음도 물기 남은 바닥처럼 축축하고 찜찜했을 것 같다.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된 후에야 사고치기 전 눈으로 찜해두었던 자리 가서 무거운 노트북 가방을 내려놓았다. 잠시 한숨을 돌린 후 일을 시작하려고 보니 아차차 커피가 없다. 커피를 다시 사기 위해 지갑을 챙겨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으로 내려가는 마지막 계단을 다 내려서기도 전에 사고를 수습해 준 영웅 같은 여직원이 나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쟁반만 들고 오세요. 다시 드릴게요. 아메리카노 그란데 맞으시죠?"


이것도 매뉴얼에 있는 상황대처법이겠지? 매뉴얼 만세, 교육훈련 만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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