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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Jul 01. 2023

재야의 고수

자발적 은둔형 프리랜서

얼마 전 대학원 졸업 후 거의 연락이 없던 동기 A에게 연락이 왔다. 최근 해외 리더십 관련 교육업체와 독점 계약을 맺게 되었고 그 업체의 프로그램에 대한 강사양성교육을 실시하니 관심이 있으면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나도 리더십 강의를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해관계자들 눈치 보느라 스트레스 팍팍 받는 컨설팅 프로젝트보다는 나 혼자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강의가 나한테는 잘 맞는다. 다만 내가 하는 강의는 HRD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수요가 매우 적은 편이다. 나와 같은 일을 해 온 많은 선배, 동료, 후배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중 상당수는 리더십 관련 강의나 코칭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리더십 분야의 수요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강의를 더 하고 싶다면 리더십 분야로 내 전문성을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 때마침 A의 연락을 받았고 보내준 자료를 보니 프로그램이 꽤 괜찮아 보였다.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교육비를 보니 헉 소리가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교육비만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거절할 결심이 굳어져 갔지만 바로 회신하지 못한 채 며칠을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고가의 교육이라 신청자가 많지도 않을 텐데 무작정 A를 기다리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미안해할 준비를 하고 A에게 카톡을 보냈다. 프로그램은 매우 좋아 보이나 교육비가 비싸서 고민된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A가 하는 말이 "그 비싼 교육에 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답니다"라고 한다. (역시 다들 나보다 부자인 것 같다) 그리고 신청자 중에는 우리 대학원 동기들도 몇 명 있다고 했다.


사실 A와 이야기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거절의 마음이 완전히 굳혀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A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교육은 정말 내가 참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지고야 말았다. 대학원 동기들과 관계가 안 좋아서가 아니다.  돈을 떼어먹고 도망친 적도 없으니 못 만날 이유가 없다. 대학원 동기 중에는 전문강사로 활동 중인 사람들이 많은데 성취감 충만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그런 극 E(Extroversion)성향 사람들 사이에서 극 I(introversion) 성향인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을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상상되었기 때문에 움찔한 것이다. 


나는 그(녀)들처럼 젊지도 예쁘지도 않다. 팔찡을 끼고 자신만만한 자세로 웃고 있는 프로필 사진 같은 것도 찍은 적이 없다. SNS를 통해서 보는 그(녀)들은 한마디로 "일 벌이기 좋아하는 활동적인 사람들"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남이 벌 일을 수습하거나 일을 없애 버리는 쪽이 전문영역이다. 그러다 보니 그(녀)들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함께 하는 시간이 편안하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그냥 하고 싶은 강의를 하고 싶을 때 하면서 살고 싶을 뿐인데 화려한 그들의 외모와 언변, 비즈니스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되면 어느 순간 내가 초라해 보일 것 같은 못난 생각도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강의를 더 많이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낯선 사람들, 나와 이질적인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A의 연락은 (전에 회사생활을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외향적인 척 가면을 쓰고 낯선 만남을 참아낼 것인지 아니면 지금 같은 상태를 유지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만들었다. 나는 혼자 있을 때 가장 편안하고 에너지가 충전된다. 일로 만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랫동안 보아온 익숙한 사람이어야 안심이 된다. 어쩌다 새로운 환경에서 낯선 사람을 만날 계획이 잡히면 그 계획이 언제든 오늘부터 바로 긴장 모드로 들어간다. 결국 나의 I(Introversion) 성향은 지금보다 조금 더 일을 하고 싶은 욕구를 뛰어넘고도 남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빛의 속도로.


얼마 전 이틀간의 강의를 마쳤을 때 한 수강생이 감사 인사를 전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재야의 고수를 만난 것 같아요."


일단 고수라고 하니 기분은 좋았다. 그런데 "재야는 뭐지?" 아니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알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강생이 "재야"라는 어휘를 선택한 것은 너무나 적절했다. 나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고 열심히 활동하거나 나를 알리는 사람이 아니니 재야에 숨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다만 그동안에는 내가 재야에 숨어 있는 이유가 타의인지 자의인지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그런데 이제는 분명해졌다.


나는 "자발적 은둔형 프리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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