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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Jan 30. 2023

프라이팬을 많이 가진 여자


어릴 때 우리 집 화장실 입구에는 큰오빠가 직접 손으로 짜서 만든 나무 책장이 있었다. 그 책장에는 여러 가지 책들이 꽂혀 있었는데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던 책은 둘째 언니가 구독하던 "COOK"이라는 요리 관련 월간지였다. 여러 나라의 음식이나 식재료에 대한 사진이 많아서 보다 보면 세계를 한 바퀴 돌아본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잡지 뒤편에 실린 간단한 심리테스트는 화장실에 앉아 있는 짧은 시간 동안 내 성격 특성을 알아보는 쏠쏠한 재미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책장에 꽂혀 있던 3년 치(36권) 가량의 COOK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고 나니 자연스럽게 그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몇 권이 추려졌는데 그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이 "프라이팬 특집기사"가 실린 권호였다. 프라이팬이 만들어지는 과정, 주로 사용되는 소재, 프라이팬의 올바른 관리법, 그리고 다양한 디자인의 프라이팬들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있었고, COOK이라는 잡지 제목답게 프라이팬을 이용해서 만들 수 있는 요리들 Recipe까지 실려 있었다. 프라이팬과 관련된  깜찍한 수제 소품들(브로치, 냉장고용 자석 등)이 만드는 법과 함께 실려 있어서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프라이팬 특집기사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 프라이팬은 다 동그랗고 검은색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세상에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 다양한 종류의 프라이팬이 존재하고 있었다. 내 지식과 경험의 한계, 그리고 세상의 다양성과 마주치게 된 첫번째 계기가 그 특집기사였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가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라고 물으면 "프라이팬을 많이 가진 여자"라고 서슴없이 대답하던 시절도 있었다. 상대가 놀라서 "프라이팬? 그냥 돈 벌어서 사면 되는 것 아니야?"라고 하면 "프라이팬을 많이 가진 여자"라는 문장 속의 숨겨진 의미를 설명을 해 주기도 했다. 내가 의미 있게 생각했던 것은 프라이팬의 갯수가 아니라 어떤 물건이든 각각 용도에 맞게 골라 가면서 쓰는 삶이었다.


프라이팬 한두 개를 가지고서  볶음밥을 볶고, 계란 프라이를 하고, 어떨 때는 생선이나 고기를 올려 지지고 볶으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볶음밥을 할 때는 웍을 쓰고, 계란 프라이를 할 때는 노른자가 들어갈 수 있는 동그란 홈이 있는 프라이팬을 쓰고, 생선 므니엘을 할 때는 생선 모양처럼 타원형으로 된 뚜껑이 달린 프라이팬을 쓰고, 어떨 때는 주철로 된 것, 또 어떨 때는 알루미늄으로 된 것.. 그때그때 필요와 용도에 따라 까다롭게 골라서 쓰는 약간은 사치스러운 삶을 살고 싶었다. 홍차를 머그잔에 우려마시는 것은 피하고 싶었고 꽁치를 구우면 꼭 무를 갈아서 생선용 접시에 올려 곁들여 먹고 싶었다.


나이가 든 지금 캠핑과 주방도구를 좋아하는 남편을 만난 덕지금 내가 가진 프라이팬은 전문 셰프들 못지않게 많다. 그런데 이제는 프라이팬을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주방이 넓지 않으면 처치곤란이 된다는 것을 아 버렸다. 게다가 아무리 프라이팬이 많아도 막상 사용하는 프라이팬은 한두개에 그치고 있으니 2:8의 법칙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도 확인해 버렸다. 때로는 프라이팬을 정리해서 당근마켓에서 팔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조차 한다. 이제는 어떻게 살고 싶냐고 누가 물어본다고 해도 더 이상 프라이팬 얘기는 꺼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음속 어딘가에는 어릴 적에 봤던 작은 잡지, "COOK"의 페이지들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싱싱한 포도를 수확하고 있는 이탈리아 토리노 농부의 자부심에 찬 표정, 기다란 종이봉투에 바게트 넣고 거리를 걸어가는 프랑스 파리지엔의 활기찬 발걸음, 독일 거리에서 팔고 있는 프렛첼의 하트모양... 그리고 내 상상력을 한없이 넓혀 주었던 반짝거리는 청동 프라이팬의 우아한 반짝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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