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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Jan 31. 2023

밥벌이의 위대함

학창 시절 반대항 운동경기를 할 때면 꼭 반 대표선수로 선발되곤 했었다. 운동실력과는 무관하게 그저 키가 약간 크다는 이유만으로 선발되다 보니 여러 불상사를 겪곤 했다.


중학생 시절 소프트볼 경기에 선수로 뽑힌 적이 있었다. 스스로 운동신경이 없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웬만하면 공이 근접하지 못할 것이 예상되는 외야 쪽에 자리 잡고 서서 경기를 하는 척만 했었다. 여학생들의 경기이니 어지간하면 내야에서 공이 구르다 말 것이고, 결국 승부수는 내야수들이 얼마나 구르는 공을 잘 잡느냐 그리고 얼마나 1루로 잘 던지느냐, 마지막으로 1루수가 얼마나 잘 잡느냐에 달려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어떤 아이가 친 공이 큰 포물선을 그리며 하늘로 붕 뜨더니 외야로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내가 있는 쪽으로!! 경기를 하는 척만 하고 있던 나는 공을 피해야 할지 아니면 공을 받는 척이라도 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공이 날아오는 속도가 나의 의사결정 속도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에 공은 그대로 내 얼굴 위로 떨어지고야 말았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멍든 얼굴로 학교에 다녀야 했다.


더 어렸던 초등학교 때는 학교 운동회의 반 대표 계주 선수로 선발되었다. 달리기를 잘 못한다고 여러 번 거절했지만 우리 반 응원단장이 너밖에 할 사람이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하게 된 것이다. 사실 내가 달리기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여자아이들 중에는 100미터를 20초 넘는 기록으로 달리는 아이들이 수두룩했는데 나는 그나마 20초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했다.


운동회가 시작되고 드디어 하이라이트인 계주 경기가 시작되었다. 내 순서는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앞서 달리던 우리 편 아이들은 1,2등 정도를 유지했었는데, 바통을 내가 넘겨 받자마자마자 순식간에 여러 명이 나를 앞질러가기 시작했다. 뛰는 와중에도 억울함과 죄책감 때문에 얼굴이 벌게지고 있었다. 이를 악물고 뛰면서 나를 억지로 떠밀어서 뛰게 만들었던 우리 반 응원단장의 눈치를 멀리서 살펴봤던 기억이 난다. 수술을 흔들던 손을 멈추고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 아이의 얼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던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여 밥벌이라는 것을 시작하면서 완전히 달라다.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 체육대회에서 배구경기가 있었고 이번에는 배구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경기규칙 상 남자 5명에 여자 1명을 넣어서 한 팀을 구성해야 했다. 남자 선수들은 공들여서 뽑지만 대개는여자 선수에 대해서는 큰 기대 없이 아무 여사원이나 1명 넣는 분위기였고 경기는 남자 선수들끼리 5:5로 하는 것과 다름없이 진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깍두기처럼 선발된 팀의 여자 선수들은 나를 대신해서 열심히 뛰어주는 남자 선수들에게 민폐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움츠리고 코트의 가장 구석을 지키며 서있곤 했다. 행여 공이 날아오면 내 몸에 맞아서 터치아웃이 될까 봐 더욱 몸을 움츠리거나 재빨리 자리에서 벗어나 주는 게 그나마 센스 있는 행동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아마 그런 상황이 싫었나 보다. 나는 가만히 구석에 있지만은 않았다. 공이 내게로 오면 피하지 않았다. 할 만하다 생각하면 과감히 팔을 뻗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간혹 공이 손에 와서 맞아 주었고 운 좋게도 상대 코트로 넘어가는 일도 생겼다. 승부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미미했지만 워낙 여자 선수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던 탓에 한두 번 공을 받아 무사히 상대 코트로 넘긴 것만으로도 나는 단번에 "운동 좀 하는 애"로 신분이 급상승되었다.


키만 약간 컸지 경기장에서는 구석을 빙빙 돌거나 공에 맞아 멍이나 들었던 내가 어쩌다가 직장에서는 운동 좀 하는 애가 되었는지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저 밥벌이의 위대함이라고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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