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 상상을 해볼 법도 한 주제인데, ‘지금 가장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한참을 고심한 끝에 떠오른 것이 외딴곳에서 한 달 살기였다. 내 일과 사사로운 집안일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먼 곳이라면 어디든 좋겠다. 산이 좋을까, 바다나 섬이 좋을까? 아담한 주택보다는 싱글룸의 아파트가 더 안전하겠지? 상상을 구체화해 볼수록 철저한 계획형인 나에게는 불쑥불쑥 끼어드는 걱정거리가 한둘이 아니다. ‘실외 배변하는 우리 집 반려견은 1일 2 산책이 기본이라 내가 데려갈 수밖에 없겠다. 호흡기 질환이 있는 우리 집 반려묘는 나 없는 사이에 또 누가 챙기지? 가끔 주말에나 기숙사에서 나오는 딸들이 엄마랑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면 과연 거절할 수 있을는지. 애들은 되고 남편은 안된 다고 할 순 없겠지...’ 이런 생각들로 나의 한 달 살기는 시작도 전에 동물과 사람으로 미어터질 지경이다. 여행 가방에 꾸역꾸역 욱여넣을 나의 의무감과 책임감에 상상만으로도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렇다면 포기.
다시 리스트를 작성해 보자.
· 풀 마라톤 완주
· 페루의 마추픽추 오르기
· 영화 ‘와일드’에서 리즈 위더스푼이 걷던 4,285km의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종주
· 철인 2종 경기 참가(바다수영이 무서워요!)
·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이쯤 되니 나의 선택에서 공통점이 보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극한의 조건에서 체력과 인내력을 시험해 보고자 할 때 떠올릴 만한 일뿐이다. 나는 왜 이런 것들이 하고 싶은 걸까? 한계에 대한 도전? 그게 아니라면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즐기거나 엔도르핀 중독인 걸까? 저런 행위들을 통해 나는 무엇을 얻길 기대하는 것인지 굉장히 궁금해졌다. 그 답을 확인하해 보는 방법은 직접 해보는 것뿐 일 테다. 마침 포항에서 열리는 하프마라톤 대회가 있어 참가신청을 해 버렸다.
[준비기간]
대회가 채 한 달이 남지 않은 시점에서 참가 결심을 했기 때문에 훈련 스케줄을 아주 촘촘하게 짰다. 주 3회 이상 단거리 회복 러닝과 15km 이상의 장거리 러닝에 근력운동까지, 대부분의 오전 시간을 운동으로 보냈다. 올라오는 체력만큼 의욕이 넘쳤다. 그러다 추석을 한 주 앞두고 남자동호회 팀과의 친선 축구 경기 중에 왼쪽 무릎에 부상을 입었다. 다음날부터 무릎이 덜그럭거리고 통증이 계속되어서 뛸 수가, 아니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무릎이 회복되는 일주일간은 헬스장에 나가 근력운동에 집중했다. 그렇게 추석이 왔고, 친정엄마가 매일 챙겨주는 삼시 세 끼를 미친 듯이 먹어 치우며 증량을 해버렸다. 무릎이 성치 않은 상황에서 견뎌야 하는 나의 몸무게가 갑자기 늘어나 버린 것이다. 참가 신청을 취소해 버릴까 망설이며 대회 홈페이지를 여러 번이나 기웃거리다 말았다. 연휴 기간에 매일 함께 달려준 둘째 아이 덕분에 마지막 주 훈련계획을 겨우 지킬 수 있었다. 대회까지 딱 4일이 남았다. 그리고 내가 가르치는 중, 고등학생들의 시험도 딱 일주일이 남았다. 밤새 시험지 만들기와 주말 보강으로 마라톤 전날까지 쉴 틈이 없었고 마라톤 당일까지 오후 보강이 잡히면서 넘쳐나던 의욕이 바닥나버렸다. ‘그래, 다음에 참가하면 되는 거야!’ 비장한 마음으로 대회 홈페이지를 클릭했다. 두둥- 신청 기한이 만료되어 참가 취소 및 환불이 불가하다는 팝업창이 불쑥 튀어나왔다.
[D-day]
무릎부상에 증량까지, 애초에 계획했던 2시간 안에 완주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2시간 30분 내에만 들어오기를 기도하며 아침 5시 30분에 기상을 했다. 8시에 대회가 시작되지만 2시간 전 식사를 마쳐야 했다. 속이 편하고 소비할 열량이 감안하여 땅콩버터를 듬뿍 바른 마른 빵에 연두부를 먹었다. 고함량 B12와 아르기닌 부스트까지 챙겨 먹고 집을 나섰다.
개회식과 준비운동을 마치고 대회가 시작되었다. 종합경기장 안의 출발선을 시작으로 송도해수욕장- 영일대 해수욕장- 환호공원을 반환점으로 다시 출발선을 돌아오는 21.0975km, 내가 오늘 달려야만 하는 여정이다. 초반부터 속도를 내는 사람들 속에서 오버페이스하지 않기 위해 호흡에 집중한다. 누가 말을 걸어와도 가볍게 대화가 가능한 정도로, 절대 숨이 차지 않게 유지하는 것이 오늘의 목표다. 내가 가려는 방향의 반대편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돌아올 땐 등에 질 바람을 기대하며 힘들다는 생각을 간신히 억누른다.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팟캐스트에 집중하기로 한다. 10km 지점을 막 지났을 무렵, 이미 반환점을 돌아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몇몇 러너들이 보인다. 무사 완주가 목표인 오늘이지만 너무 뒤처지는 건 아닌지 잠시 초조함을 느낀다. 중간에 기록을 확인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기 때문에 손목으로 가려는 나의 시선을 가까스로 돌려 바다를 향하게 한다. 이젠 두 발이 저절로 일정하게 움직이며 몸이 알아서 달리는 상태에 접어들었다. 멈추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한동안 편안하게 달릴 수 있다. 얼마 가지 않아 반환점에 도달했다. 정신은 여느 때보다도 맑지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숨소리와 지면을 딛는 발소리가 나 스스로 의식하는 전부가 되었다. 조금씩 발목이 둔해지고 테이핑을 해둔 무릎이 다시 덜그럭거리기 시작한다. 여전히 반대편에서 불어와 내 얼굴을 때리는 바람이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괜찮다’를 수십 번 중얼거렸을 즈음, 멀리서 거리를 표시한 표지판이 보였다. 반환점을 지난 지 한참 되었으니 아마 18km 지점쯤 되었을 거라 짐작하며 속도를 조금 내어본다. ‘아…. 16km밖에 안 왔다니! 아직 5km가 남았다.’ 갑자기 내 몸이 몇 배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요의가 느껴질까 봐서 급수대를 모두 지나쳤는데 남은 거리를 생각하니 입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다음 급수대가 보였지만 진행요원들이 벌써 정리를 시작한 것인지 테이블이 준비된 컵이 없었다. 물 한 잔 달라고 요청하려면 멈춰 서야 하는데 그런 다음 다시 뛸 자신이 없었다. 본격적으로 해가 나면서 기온이 오르고 갈증이 더해 딱 죽을 것 같을 때 등장한 내리막과 오르막 구간에서는 천국과 지옥을 번갈아 맛보았다.
이제 남은 거리 2km. 평소라면 금방 내달릴 수 있는 거리지만 마치 러닝머신 위를 뛰는 것처럼 몸이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과 함께 ‘이젠 그냥 걸어가도 되잖아!’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시작되었다. 참가 신청을 한 내 자신이 너무도 원망스러워 상스러운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찰나에 길가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외쳐댔다. “할 수 있어요. 조금만 버텨봐요.” 그 소리에 갑자기 힘이 솟구쳤다. 시작했으니 제대로 끝내고 자랑스러운 내가 되고 싶었다. 어느덧 종합경기장이 저 멀리 보였고 조금 더 버티니 결승선이 내 눈앞에 있었다. 나를 알아보고 한 손을 번쩍 들어 흔들어 주는 남편이 눈물 나게 반가웠다. 일그러져 있던 표정을 애써 가다듬으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뛸 때는 못 느꼈던 어지러움과 메스꺼움이 몸을 멈춰 세우자 한꺼번에 밀려왔다. 땅바닥에 반쯤 누워 물과 이온 음료, 빵과 쿠키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기록을 확인했다. 기대했던 기록보다 20분이나 빠르게 들어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신이 나서 완주 메달을 목에 메고 기념사진을 잔뜩 찍었다.
하프마라톤을 완주하고 나흘이 되던 날, 샤워하던 중에 문득 깨달았다. 지난 며칠 내가 얼마나 평온한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는지를. 그러고 보니 생각이 많아지고 마음이 번잡해지면 나는 늘 밖으로 나가 걷거나 뛰고 있었다. 일종의 내 안의 불안을 다스리는 법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이제껏 자신만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