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많은 말을 하지만, 대화하지 않는다.” - 새뮤얼 존슨 『렘블러』(1752)에서
문득, 대학 때 친구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툭하면 서로의 자취방에 쳐들어가 함께 밥을 해 먹고 술을 마시던 그녀와는 대학 졸업 후, 취업과 결혼으로 거주하는 지역이 멀어지면서 자주 보지 못하게 되었다. 30대 때만 해도 종종 긴 통화를 하면서 안부를 묻고 조만간 만나 ‘그렇게 좋아했던 상추 튀김에 참이슬을 꼭 한잔하자며’, 기약 없는 재회의 순간을 이야기하며 설레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린 각자의 목소리가 아닌 문자와 카카오톡으로 소식을 전한다. 그것들을 통해 오가는 우리의 대화에는 의도에 따라 높낮이가 다르게, 말끝마다 붙던 그녀의 “(수긍의 ) 맞나.../ (되묻는) 맞나?/ (쇼킹할 때) 맞나???” 가 없다. 재미있는 얘기를 할라치면 미리 흥분해 버려서 들숨과 날숨이 뒤섞인 컹컹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 역시 들을 수가 없다. 그냥 그렇게 텍스트만 남은 우리의 이야기가 스마트 폰 화면에 떠오르고 또 사라진다. 그녀의 안녕이 예전만큼 내게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우리의 대화가 예전만큼 유쾌하지 않아서도 아닌데... 나는 그날도 통화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저 카카오톡 프로필에 올라온 친구의 최근 사진을 보면서 그녀의 근황을 나 혼자 상상하는 걸로 대신했다.
이미 인터넷이 발달하고 다양한 스마트 기기가 존재하던 세상에 태어나 자란 나의 아이들은 좀처럼 통화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 중요한 이야기부터 시답잖은 농담, 혹은 별 뜻 없는 ‘ㅋㅋㅋ’ 까지도 텍스트로 변환하여 주로 메신저나 카카오톡, 디렉트 메시지를 통해 서로 소통한다. SNS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친구들의 피드를 보면서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좋아요’를 눌러 호감을 표시한다. 얼마 전 생일을 맞은 큰아이의 휴대폰은 생일 당일이 되던 자정부터 종일 요란했다. 수많은 기프티콘과 생일 축하 메시지가 전송되었고 개중에는 간혹 생일 축하 노래나 목소리를 녹음해 보내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직접 전화를 걸어오는 친구는 드물었고 딸아이 역시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메시지로 답할 뿐 누구와도 통화를 하진 않았다. 온종일 학교에서 붙어있었는데도 하고 싶은 말이 천지라 몇 시간씩 친구와 전화통을 붙들고 있다가 등짝에 전해지는 엄마의 매서운 손맛을 보고서야 아쉬운 듯 수화기를 내려놓았던 나의 세대와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SNS를 통해 오래전 소식이 끊긴 친구를 되찾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예술가와 팔로우를 맺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일들이 SNS를 통해 가능해졌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어도 되는 공간. 그 안에서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다. 쉴 새 없이 올라오는 피드에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그 안에서 단절과 고립을 두려워하며 열심히 새로고침을 누른다. 일방적인 소통 속에서 가끔은 희미한 연대감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차별과 혐오가 묻어나는 이야기(게시글) 속에서 불쾌감을 경험한다. 별것 아닌 내용이 될 수도 있지만 발화자의 목소리(어조, 크기, 빠르기)가 통제되어 있는 SNS에서는 감정이 고려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오로지 텍스트로만 남아 기계로 중계될 뿐이다. 그 안에 대화는 없다. “잠시만요! 무슨 말씀이시죠?” 하고 되물어 볼 여지가 없으니 소통이 될 리가 만무하다.
많은 곳에서 이야기는 넘치지만 대화는 부족하다.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는 요즘이지만, 어쩌면 내가 오히려 더 외로워진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