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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 Oct 19. 2016

메멘토 모리

기억하라, 너도 죽는다.

프라하, 내 첫 유럽 여행지다.


선배가 '우리도 유럽 가보자'로 시작됐다.

유럽은... 멀다. 멀면 친구에게 냥이들을 부탁하기 미안하게 길어진다. 그리고 비싸다. 이즘 되면 귀찮고 싫다.


하지만 여행 동행자가 생기면 그에 따른 혜택이 크다. 그래서 넙죽 받았다.

근데 유럽 어디를? 어렵지 않았다.


극기 훈련 같은 서유럽 5개국 이런 거 제외, 언제 또 갈지 모르니 딱 한 곳이라면이라는 질문에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 그래. 프. 라. 하.


세트장 같은 동화마을

 

프라하-드레스덴-체스키크룸로프-할슈타트

드레스덴을 빼면 일명 동화마을 시리즈다.


물론 예뻤다. 유럽 하면 떠오르는 그 모습들 맞다.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법한 궁전과 성들, 높은 곳에서 한눈에 보이는 '나 유럽!!!'이라 외치는 것 같은 붉은 지붕들, 알록달록 페인트로 칠하고 집집마다 베란다에 제라늄을 내놓은 호숫가 마을.


그런데 이상하게 난 아시아의 어느 세트장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동화에 나올법한 이 풍경들은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특히 아시아 쪽 사람들을.


만약 사진과 같이 한적하게 즐기려면 새벽이나 밤에 나와야 한다. 수요가 많으면 공급이 부족하니 맘고생을 덜하고 싶으면 예약도 서둘러야 한다.

어그러지는 일정을 끼워 맞추다 보면 신나고 재밌던 여행 준비가 점점 변한다. 급기야 모든 예약이 완료된 후엔 거품 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다시는 안 간다며.


그리고 언제나처럼 열심히 계획한 일정은 준비할 때의 기대만큼 즐겁진 않다. 인생은 원래 계획대로 잘 안된다. 그보단, 남은 시간을 보내려고 현지에서 바로 정한 곳이 두고두고 자리 잡는다.

그렇다. 무계획이  종종 필요하다. 특히 여행에서는.


메멘토모리


로마 개선장군 행진 바로 옆에서 가장 미천한 노예가 외치던 말이다. 너도 죽는다.

너도 신이 아닌 언제가 죽는 같은 인간이니 잘난 척 말라는 뜻이었겠지.


세트장 같은 동화마을에서도 한적한 곳이 있다. 프라하에는 비셰흐라드. 10세쯤 지어진 성곽과 그 안에 묘지들. 그리고 할슈타트에 Lutheran 교회 옆 묘지들. 그렇다. 일상생활 근처에 자리 잡은 죽음에 대한 기억들.



사실, 죽음이라는 거 살면서 옆으로 치워놓고 싶은 거다. 교회와 교회 내부는 열심히 사진 찍던 사람들도 묘지에서는 발길을 돌리거나 조용히 스쳐간다.


삶이, 생명이 유한하다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사는 동안 겪지 않고 잊고 싶다. 그럼에도 틈틈이 죽음을 자각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 가끔 아래와 같이 경로가 수정되기도 한다. 사는 방향에 대해서.


절대적인 것으로 귀의를

우리에겐 습관이 있다. 모든 것에서 추론 가능한 인과관계를 도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딪히는 한계를 만나면 절대적인 것에 귀의한다. 인간은 모순을 의외로 쉽게 받아들인다.

그럴 수 있다. 해결 안 되고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내세가 있다고 혹은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는 것도 방법이다. 그것이 신의 뜻이 될 수도 혹은 목숨 건 이념일 수도 있으며, 자본주의 만능 해결사인 돈일 수도 있고 죽음의 기억을 망각하게 해줄 젊음일 수도 있다.


카르페디엠

사실 이 말은 좀 다른 의미로 해석하면 좋겠지만 종종 이렇게 사용된다. '어차피 한 번인 생이다. 더 이상 없다. 내가 원하는 데로 즐기다 가는 거다.'

여기서 좀 더 나가면 '다른 이들이 무슨 상관인가 내 맘대로다'까지 간다. 내 인생 내 맘대로. 그런데 이렇게 유아적 발상에 그치기에는 우린 좀 오래 산다.


손님으로 공존하는 생명권

나도 너도 유한하다. 언젠가 끝난다. 그리고 자기 의지와 선택에 의해 태어난 생명은 없다. 우리 모두 세상에 우연히 그냥 던져진 거다. 의미 같은 거, 별나게 소중한 거 그런 거 없다. 어때? 불편하고 허무하지?


그런데 난 이 허무한,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자각에서 나온 동질감이 서로의 삶을 더 가치 있게 지켜줄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지금 내 곁에 살고 있는 생명들은 무심코 던져져 끝이 있는 삶을 발버둥 치며 사는 거다. 그러니 사는 동안 서로 잘 살아내고 아름답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때로는 나와 같다는 동질감에서 나온 이해가 관용을 뛰어넘는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톨레랑스는 은폐된 패권 논리입니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 두는 것입니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강자의 여유이기는 하지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은 아닙니다.

담론 | 신영복


인권? No No 생명권

죽음을 공유한 동질감은 내겐 인간보다 훨씬 약한 생명들을 바라보게 한다. 사실, '인권'은 근대 인류의 발명품이다. 인간이라는 사피엔스 종 뒤에 선을 긋는 거다. 유태인 앞에서 혹은 유색인종 앞에 긋는 선과 다른가?

인간이라는 것에 집착하면 언젠가 당신 앞에도 선이 그어진다. 가치 없으니 무시하자고.

이미 현실에서 자주 보고 있지 않나? '국가 경제 발전에 발목을 잡는...' 이라며 생명이 무시되는 일들을.


그러니 생명을 보면 좋겠다. 그것도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힘없는 생명을. 그런 생명들의 잘못이라면 하필 욕심 많고 관용이라는 특성 따위는 없는 사피엔스가 번성하는 인류세에 지지리 복도 없이 태어난 것 밖에 없다. 그리고 이미 인간은 공존했던 생명들에게 지은 죄가 많다.


우리가 범인이다. 진실을 외면할 방법은 없다. 설사 기후변화가 우리를 부추겼다 할지라도, 결정적 책임은 인류에게 있다.
....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았다는 급진적 환경보호 운동가의 말은 믿지 마라. 산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호모 사피엔스는 모든 생물들을 아울러 가장 많은 동물과 식물을 멸종으로 몰아넣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생물학의 연대기에서 단연코 가장 치명적인 종이라는 불명예를 갖고 있다.

사피엔스 | 유발 하라리


죽음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삶의 무게를 덜어주리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혹은 내 인생의 천명과 같은 의미들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다지 특별할 것도 의미도 없다는,  이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을 마주했을 때 거기서부터 의외로 담담하게 살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 어깨에 잔뜩 짊어지고 있는 삶에 대한 짐을 좀 가볍게 해줄 수도 있다.

'왜 이런 것들이 나에게 생기지?' '내 인생의 의미는 도대체 뭔가?' '힘들다. 살고 싶지 않다' '내 인생은 망했다. 터널 속에 갇혔다'

그냥 사는 거다. 다른 생명들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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