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단풍을 볼 수 있을까?

새벽 등산의 자유를 빼앗긴 이유

by 게을러영
우암산정자.jpg
20240125_우암산겨울.jpg

만추의 육각 정자 풍경(좌)

연 나흘째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며 눈발까지 흩날리는 날씨에 귀차니즘을 이기고 올라온 산정의 모습. 상쾌함과 충만한 자족을 성사하였다. 산은 항상 옳다.(우)




이 동네로 이사 온 것은 십팔 년 전 일이다.

당시 나는 등산에 미쳐 있었고, 출근 전 새벽 산행을 다녀올 정도로 산의 매력에 깊이 빠져있었다. 이 동네가 막 개발되던 시기, 수많은 아파트 신축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주목한 장점은 바로 '숲세권'이었다. 당시에는 그 단어가 생소했지만, 지금은 아파트 홍보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이 조건은 내겐 ‘등산로 입구까지 도보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과 등가인 가치였다. 편도 20분을 자차로 이동해야 했던 이전 상황보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나는 주저 없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 후 지금까지 천 번을 넘게 이 산을 오르내렸다. 과장도 아니고, 거짓은 더더욱 아니다. 오죽하면 가끔 동행하는 남편에게 날 보쌈하여 이 산 어디에다 두어도 10분 안에 등산로를 찾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정도로, 이 산은 내 집과 같은 공간이 되었다.

올 초 명예퇴직을 한 후에는 굳이 새벽 등반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 오전에 독서와 글을 쓰고 환기할 겸 오후에 산을 찾기도 했다. 물론 이른 더위 때문에 결국 얼마 못 가서 다시 새벽 산행으로 돌아왔다. 다시 그 시간은 나만의 신성한 수행이 되었다.


한 달포 전이었을까?

십팔 년간의 루틴을 멈춰 세운 사건이 터졌다. ‘인생은 의외성이 8할’이라는 말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늦게야 발견한 <성범죄자 알림e>란 알림 서비스가 발단이었다. 여성가족부에서 성범죄자가 거주지 주변으로 이사를 오면 알려주는 고지였다.

링크를 따라 들어간 순간, 오마이갓! 190cm에 100kg이 넘는 거구인 그자가 이사 온 곳이 하필이면 그 등산로 입구였다.

우리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는 안도는 잠시, 새벽 산행에 즉각적인 제동이 걸렸다.

남편한테 사정 얘기를 하고 동행을 요구했으나, 돌아온 것은 ‘가지 말라.’는 단칼의 지청구뿐. 남의 편다운 대답이었다. 친구들 역시 미쳤냐며 절대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올가을 나는 이슬 품은 새벽 단풍을 볼 수 있을까?

자존심을 굽히고 남편에게 억지로 아양을 떨어서라도 동행을 구해야 하나?

자유롭게 걷던 산을 낯선 위협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이 현실이 야속하다. 그가 앗아간 것은 단순히 산행의 기회가 아니다. 새벽 숲은 내겐 정화의 공간이었고, 다시 벅찬 세상으로 나설 힘을 주던 내 정신의 비상구였다.

이 모든 것이, 그자 아니 그놈 때문이다.


---------------------------------------

이 글은 '탁현민의 더뷰티플' 1주년 기념 <더 뷰티풀 백일장>에서 아차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25년 10월 11일 방영)

#탁현민더뷰티풀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


이전 28화송편 속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