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장|남겨지다

끝나지 않은 쪽의 삶

by He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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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vid Matthews

떠난 사람은, 남겨진 마음이 얼마나 오래 썩어가는지 모른다.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한 무게를 내려놓았으니, 그 선택은 불가피했고 불행 중 최선이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을지도 모른다. 떠날 수밖에 없던 마음이 오죽했겠느냐는 말은 그래서 늘 떠난 쪽의 언어로만 남는다. 하지만 남겨진 사람에게 그날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작되는 삶, 이유를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시간을 살아내는 일이 그날 이후의 일상이 된다.
남겨지다는 것은 혼자가 되는 일이 아니다. 갑자기 세상의 기울기가 바뀌는 일이다. 같은 방, 같은 공기, 같은 시간인데 발밑이 미묘하게 기울어져 있어 숨 쉬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상태다. 이전에는 둘이 나누어 들던 무게가 이제는 온전히 한 사람의 몫이 된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던 온도는 사라지고, 익숙했던 공간은 빈 껍질처럼 울린다. 웃음이 사라진 것은 아닌데 웃을 이유가 사라지고, 눈물이 고여 있어도 언제 울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가장 잔인한 사실은, 남겨진 사람은 여전히 떠난 사람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데 떠난 사람은 그 이후의 마음을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떠난 사람은 자신의 사정으로 떠났다고 말한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누구의 삶도 함부로 재단할 수 없고, 고통에는 서열이 없다. 그러나 남겨진 사람의 고통은 늘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이해받지 못한 감정은 안쪽으로 눌러 담기고, 그 무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히 침전된다. 새벽이 되면 휴대폰 화면을 켰다 끄기를 반복하고, 이미 끝난 대화창을 한참 들여다본다. 아무 말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손끝을 붙잡는다. 그 순간 남겨진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미련한지 알면서도, 그 미련이 사랑의 마지막 형태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한다.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이라는 문장은 남겨진 사람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 문장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생각은 반복된다. 그것은 반성이라기보다 벌에 가깝다. 남겨진 사람은 스스로를 벌하며 시간을 보낸다. 잘 살아가는 것조차 미안해지고,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서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돌린다. 마치 자신에게 허락된 감정은 슬픔뿐인 것처럼, 슬픔을 내려놓는 순간 배신자가 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고통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남겨진 사람은 슬픔을 극복하지 않는다. 다만 슬픔을 끌어안은 채 하루를 넘긴다.
시간은 흐른다. 달력은 넘겨지고 계절은 바뀐다. 그러나 마음은 종종 같은 자리에 머문다. 특정한 냄새, 특정한 노래, 해가 기울어지는 각도 하나에 마음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장례식 이후 처음 맞는 평범한 하루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사람을 무너뜨리는 날이 있다.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데 자신만 멈춰 있는 느낌, 뒤처진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시간대에 고립된 느낌. 남겨진 사람은 그 고립 속에서 묵묵히 하루를 살아낸다. 누군가의 “이제 괜찮아졌지?”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설명할 힘은 남아 있지 않다.
떠난 사람은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남겨진 사람이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하루를 견디는 일이 얼마나 많은 결심을 필요로 하는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에 불을 끄는 순간까지 얼마나 많은 감정을 삼켜야 하는지. 평범한 안부 인사 하나에 마음이 크게 흔들리는 날도 있고, 아무도 묻지 않는 날에는 더 깊은 외로움이 찾아온다. 남겨진 사람은 선택하지 않은 삶을 산다. 떠난 사람의 결정으로 시작된 길을,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걸어간다. 그 길 위에서 남겨진 사람은 종종 자신이 왜 여기에 서 있는지조차 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다는 것은 단순한 약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처 입은 채로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요구한다. 무너진 자리에서 말끔히 일어서는 일이 아니라, 무너진 채로 버티는 시간들이 있다. 그 시간 동안 남겨진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다시 배운다. 슬픔과 공존하는 법, 죄책감을 밀어내지 않고 숨 쉬는 법, 삶을 완전히 놓지 않는 법을. 그것은 대단한 극복담이 아니라 아주 조용한 지속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되는 선택, 오늘을 넘기는 일이다.
떠난 사람을 원망하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과, 그래도 원망이 스며드는 순간 사이에서 남겨진 사람은 늘 흔들린다. 이해하려는 마음과 끝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사이에는 깊은 틈이 있다. 그 틈에서 남겨진 사람은 자신에게 질문한다.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함께였던 시간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답은 쉽게 오지 않는다. 대신 질문만 남는다. 그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부딪히며, 남겨진 사람을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바꿔놓는다. 더 조심스러워지고, 더 느려지고, 쉽게 마음을 내주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어쩌면 떠난 사람은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남겨진 사람에게 끝은 없다. 다만 형태가 변할 뿐이다. 사랑은 그리움으로 바뀌고, 함께 그리던 미래는 혼자 견뎌야 할 현재로 바뀐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부서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남겨진 사람은 결국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간다. 상처를 지우지 못한 채로, 하지만 상처와 함께 걸어간다. 언젠가는 웃음이 돌아오고, 그 웃음에 더 이상 죄책감이 따라붙지 않는 날도 온다. 그것은 떠난 사람 덕분도, 완전히 극복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냥 살아냈기 때문이다.
남겨지다,라는 말은 그래서 무겁다. 그것은 단순한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삶이다. 떠난 사람의 선택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 설명되지 않은 감정을 안고 이어지는 시간이다. 떠난 사람은 끝내 다 헤아릴 수 없겠지만, 남겨진 사람은 오늘도 자신의 마음을 견디며 산다. 박수도 없고, 이해도 없는 싸움 속에서 조용히 하루를 넘긴다. 슬픔 속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그 고요한 투쟁이야말로, 남겨진 사람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