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우며 사랑했던 시간들
애처로운 당신, 무엇이 그댈 슬픔으로 몰아붙였을까, 아니, 밀어붙였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어. 나는 아직 떠나지 못했지만, 이 글은 이미 돌아서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서 있으면서도, 우리는 늘 서로를 비껴갔다. 당신의 슬픔은 갑작스러운 낙뢰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등을 조금씩 떠밀어온 바람 같았고, 나는 그 바람의 방향을 읽지 못한 채 그대 곁에 남아 있었다. 위로는 늘 한 박자 늦었고, 이해는 종종 오해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애잔한 당신, 나는 여기에 있는데 단 한순간도 날 바라봐주지 않는 그대가 참으로 야속하다. 같은 시간에 숨을 쉬면서도 다른 계절을 걷는 기분이었다. 당신의 하루에는 가랑비가 내렸고, 나의 하루에는 당신을 기다리는 햇빛이 남아 있었다. 돌아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치솟을 때마다, 나는 그 마음을 접어 가슴에 넣었다. 사랑은 접을수록 얇아질 거라 믿었는데, 이상하게도 더 두꺼워졌다. 발목을 붙잡은 건 미련이 아니라 습관이었고, 습관은 사랑보다 오래 사람을 붙든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았다.
당신을 사랑한 이후로 처음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나를 미워해본 건. 당신의 슬픔을 이해하겠다고 다짐할수록, 나는 나를 덜 이해하게 되었다. 괜찮다는 말이 입에 붙어버려서, 진짜 괜찮은 날이 언제였는지 가늠조차 흐려졌다. 설명하지 않는 일에 능숙해졌고, 참는 일에 익숙해졌다. 당신의 하루를 배려하느라 나의 하루를 접어두는 일이 반복되었고, 그 접힌 자리에 주름이 남았다. 주름은 시간이 만든 흔적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마음의 접힘이었다.
나는 당신의 아픔을 안아보려 했지만, 그 아픔은 늘 나보다 컸다. 말해주지 않는 마음을 해독하듯 바라보다가, 끝내 나는 당신의 침묵을 대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쌓인 말들은 내 안에서 무게를 가졌고, 무게는 나를 천천히 가라앉혔다. 당신은 몰랐을지도 모른다. 아니, 알았지만 모르는 척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때로 자신을 살리기 위해 가장 가까운 손을 놓는다. 그 손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당신의 시선은 늘 멀리에 있었다. 이미 지나간 밤을 향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향하거나. 그 사이에서 나는 현재로 남아 있었다. 지금 여기의 나를 보아 달라는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요구가 되는 순간, 사랑이 변질될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기다렸다. 기다림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기다림이 배려가 아니라 자기부정으로 바뀐 순간은. 사랑이 나를 지우기 시작했다는 걸, 우리는 언제 알아차려야 할까.
그럼에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면 목소리는 부드러워졌다. 이름은 사람을 가장 솔직하게 만든다더니, 나는 그 말의 증거였다. 미움은 잠시 숨을 고르고, 사랑은 습관처럼 고개를 들었다. 떠나고 싶으면서도 남아 있고, 원망하면서도 이해하려 드는 마음. 나는 늘 두 사람이었다. 당신을 향한 나와, 나를 외면한 나. 그 둘이 같은 몸에 살면서 서로를 밀어냈다.
혹시 당신은 알고 있을까. 내가 아무렇지 않은 척 건네던 말들 사이에 숨겨진 작은 구조 신호를. 괜찮다는 말의 반대편에서 울리던 미약한 도움의 소리를. 나는 크게 요구하지 않았다. 단 한 번만, 정말 단 한순간만, 나를 바라봐주길 바랐을 뿐이다. 나를 통과하지 말고, 나를 경유해 달라고. 당신의 하루가 나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온기가 되기를 바랐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오늘은 당신에게 묻지 않으려 한다. 왜 그랬는지, 왜 나를 보지 않았는지. 대신 나에게 묻는다. 왜 나는 그렇게 오래 나를 미뤄두었는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순간을 양보했는지. 그 질문 앞에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으려 한다. 떠나는 것은 용기라고들 말하지만, 남아 있는 것도 때로는 용기다. 다만 그 용기가 나를 살리는지, 더 깊이 가라앉히는지는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한다.
당신에게서 돌아서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사랑이 남아서인지, 익숙함이 붙잡아서인지. 분명한 건 이것이다. 당신에게서 멀어지는 건 실패가 아니었다. 나에게서 너무 멀리 와 있었다는 증거였을 뿐이다. 그래서 오늘, 나는 방향을 고친다. 당신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되찾기 위해서. 애처로운 당신을 이해하려 애쓰던 만큼, 애잔한 나를 돌보려 한다.
이 편지는 이별의 선언도, 화해의 청원도 아니다. 기록이다. 내가 여기에 있었고, 당신을 사랑했고, 그 사랑 속에서 조금씩 나를 잃어갔다는 사실에 대한. 언젠가 이 문장들이 당신에게 닿든 닿지 않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오늘, 나는 나에게로 한 걸음 돌아섰다는 것. 사랑은 끝나도 사람은 남아야 하니까. 오늘도 나는 조심스럽게 연습한다. 당신에게서 멀어지는 연습이 아니라, 나에게로 돌아오는 연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