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겨울

버틴다는 이름의 온기

by Helia

나는 겨울이 오면 가장 먼저 감정이 식는 사람이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얼어붙는다는 걸, 몇 번의 겨울을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차가운 공기가 문틈으로 스며드는 순간,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한다. 이번 겨울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계절은 매번 반복되지만, 그 안을 통과하는 나는 늘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겨울은 단순한 날씨가 아니라, 나를 시험하는 질문처럼 느껴진다.
추운 겨울의 공기는 사정이 없다. 얼굴을 때리고, 숨을 빼앗고, 몸을 움츠리게 만든다. 그 앞에서는 누구도 당당할 수 없다. 두꺼운 외투를 입어도, 장갑을 껴도, 추위는 반드시 남은 틈을 찾아낸다. 마치 우리가 애써 감추고 덮어두었던 마음의 균열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듯이. 겨울은 늘 그렇게 정직하다. 괜찮은 척하던 표정을 걷어내고, 정말로 남아 있는 상태를 들춰낸다.
아침이 가장 버겁다. 이불속은 아직 밤이고, 세상은 이미 하루를 시작하라고 재촉한다. 몸을 일으키는 일 하나에 마음을 설득해야 한다. 일어나야 하는 이유를 하나씩 떠올리며 스스로와 흥정을 한다. 오늘 하루만 버티자, 오늘만은 괜찮을 거야. 그렇게 시작한 하루는 대단하지 않다. 특별한 사건도, 눈에 띄는 성취도 없다. 하지만 겨울에는 그런 하루가 오히려 값지다. 아무 일 없이 하루를 넘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애쓴 날이 된다.
사람 관계도 겨울을 닮았다. 어느 순간부터 말이 줄어들고, 연락이 뜸해지고, 이유를 묻지 않은 채 멀어지는 사이들. 우리는 흔히 계절 탓을 하지만, 사실은 서로의 온도를 확인하지 않았을 뿐이다. 겨울은 혼자 견디기 어려운 계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혼자가 된다. 기대하지 않기 위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선택한 고독은 차갑지만 솔직하다. 누구의 체온에도 기대지 않은 채, 자기 숨으로 하루를 버텨내는 일. 그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을 가장 있는 그대로 마주한다.
이 계절이 유독 잔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고, 사소한 말에도 쉽게 무너진다. 괜히 예민해졌다고 스스로를 나무라 보지만, 겨울은 애초에 그런 계절이다. 약해질 수밖에 없는 시간.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시기.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버텨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는 겨울을 건널 수 없다는 것도, 이 계절은 억지로 밝아지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추운 겨울에는 작은 온기가 크게 다가온다. 김이 오르는 국 한 그릇, 손에 쥔 머그잔의 미지근한 온도, 버스 안에서 잠깐 스치는 난방의 공기.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장면들이 이 계절에는 위로가 된다. 겨울은 알려준다. 우리가 진짜 필요로 하는 건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라는 걸. 아주 사소한 온기 하나면, 하루는 충분히 살아낼 수 있다는 걸.
밤이 길어질수록 생각도 깊어진다. 불을 끄고 누우면, 그동안 애써 밀어두었던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잘해주지 못했던 순간, 하지 못한 말, 끝내 닿지 못한 마음들. 겨울의 밤은 그런 기억들을 얼음처럼 보존해 두었다가 조용히 꺼내 보인다. 나는 그 기억들을 외면하지 않으려 애쓴다. 차갑지만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아픔을 모른 척한다고 해서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걸, 겨울은 늘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이 계절을 지나며 나는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 모든 것을 안고 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추위는 불필요한 것들을 가차 없이 떨어뜨린다. 무거운 생각, 쓸모없는 자책, 이미 끝난 후회들. 그것들을 내려놓지 않으면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겨울은 선택의 계절이다. 무엇을 품고 갈지, 무엇을 두고 갈지 결정해야 하는 시간. 남는 것은 많지 않지만, 그만큼 선명하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세상은 잠시 멈춘 것처럼 고요해진다. 소리는 묻히고, 색은 단순해진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 안의 소음을 듣는다. 겨울의 고요는 비어 있지 않다. 오히려 많은 말을 품고 있다. 서두르지 말라는 신호, 지금 이 순간도 삶이라는 조용한 선언. 우리는 늘 다음 계절을 기다리며 현재를 통과하려 하지만, 겨울은 말한다. 이 시간도 충분히 살아볼 가치가 있다고.
추운 겨울을 견디며 나는 조금씩 달라진다. 더 강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전보다 솔직해졌다. 약해지는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고, 따뜻함을 알아보는 감각은 훨씬 예민해졌다. 겨울은 나를 부수지 않았다. 대신 나를 천천히 다듬었다. 차가움 속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따뜻해질 수 있는 사람인지 배웠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겨울 속을 걷는다. 손끝은 차갑고 숨은 희게 흩어지지만, 마음 어딘가에는 작은 불씨가 남아 있다. 거창한 희망은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겼다는 사실,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안도감. 추운 겨울은 여전히 버겁지만, 이제는 안다. 이 계절도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것을. 그리고 이 시간을 견뎌낸 흔적들은, 다음 계절의 나를 분명히 지탱해 줄 것이다. 혹시 당신도 지금, 이 겨울을 버티고만 있는 중이라면. 괜찮다. 버틴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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