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원인이 아니라, 폭로자였다
사무치는 엘리스의 봄날들은 늘 조금 늦게 도착했다. 어떤 사람에게 봄은 시작의 신호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견뎌야 할 계절이 된다. 엘리스에게 봄은 언제나 그런 쪽에 가까웠다. 거리의 나무들이 앞다투어 연둣빛을 키워내는 동안에도, 그녀의 시간은 여전히 겨울의 그림자를 밟고 있었다. 모두가 가벼워질 준비를 할 때, 엘리스만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부터 고민했다. 봄이 온다는 사실보다, 봄이 오면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는 것들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엘리스의 봄은 꽃보다 공기가 먼저 아팠다. 따뜻해진 바람이 스칠 때마다, 오래 묵혀둔 기억들이 함께 들이닥쳤다. 잊었다고 믿었던 장면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던 얼굴들, 다시는 꺼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던 말들이 봄바람을 타고 되살아났다. 겨울에는 눈으로 덮어둘 수 있었던 것들이 봄이 되면 모조리 드러났다. 외투 속에 숨겨두었던 마음도, 계절의 온도 앞에서는 속절없이 얇아졌다. 엘리스는 그 노출이 두려워 일부러 창문을 닫고 살았다.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환해질까 봐.
사람들은 말한다. 봄은 시작의 계절이라고. 그러나 엘리스에게 봄은 늘 끝의 다른 얼굴이었다. 관계가 조용히 막을 내렸고, 기대는 이맘때쯤 가장 쉽게 부서졌다. 새로움이 오기 직전, 가장 많은 것들이 떠났던 계절. 그래서 엘리스는 봄이 오면 늘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이번에는 무엇을 잃게 될까. 무엇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희망보다 불안이 앞섰고, 설렘보다 체념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기대하지 않는 법으로 자신을 보호하면 덜 아플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조금씩 줄였다.
그럼에도 봄은 집요했다. 문틈으로 스며들고, 커튼 사이로 번지고, 마음의 가장 얇은 틈을 정확히 찾아냈다. 외면한다고 사라지는 계절이 아니었다. 길가에 흩어진 꽃잎 하나, 버스 정류장에서 멍하니 서 있는 낯선 사람의 표정 하나, 오후의 커피잔 위에 내려앉은 햇살 하나에도 봄은 숨어 있었다. 엘리스는 그런 순간마다 이유 없이 숨을 고르곤 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무 말도 듣지 않았는데, 가슴 한가운데가 쿡 하고 저려왔다. 마치 오래된 상처가 날씨를 먼저 알아보듯, 그녀의 마음은 계절을 가장 먼저 느끼고 있었다.
엘리스의 봄날들은 대체로 조용했다. 특별한 사건도, 극적인 변화도 없었다. 아침이 오면 일어나고, 하루를 건너 밤이 되면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겉보기에는 평온했고, 말투는 언제나 무난했다. 괜찮다는 말도, 잘 지낸다는 인사도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그 평온의 이면에서 마음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웃고 있는 얼굴 뒤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마다 엘리스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봄은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지만, 그녀를 오히려 안쪽으로 더 깊게 밀어 넣었다. 혼자가 익숙해질수록, 고요는 점점 더 큰 소리를 냈다.
어느 날 엘리스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이렇게 사무치는 이유는 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봄은 원인이 아니라 폭로자였다. 애써 덮어두었던 감정들, 미뤄두었던 진실들,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마음의 균열을 봄이 대신 들춰냈을 뿐이었다. 괜찮아진 줄 알았던 마음은 사실 잠시 조용해졌을 뿐이었고, 끝났다고 생각했던 감정은 계절이 바뀌자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엘리스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봄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다시 아파질까 봐가 아니라 아직 아프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걸.
그 깨달음 이후, 엘리스의 봄은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아팠고, 여전히 사무쳤지만, 그 감정을 전부 밀어내지는 않았다. 괜찮은 척을 하다 들킨 날도 있었고,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쏟아진 오후도 있었다. 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날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날들 덕분에, 엘리스는 자신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무친다는 것은 완전히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마음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엘리스는 봄을 완전히 미워하지는 못했다. 아프지만, 동시에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흔들리는 마음조차 봄이라는 이름을 얻으면 잠시 시처럼 느껴졌다. 사라지지만 피어나는 것, 끝나지만 다시 시작되는 것, 붙잡을 수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 봄은 늘 그런 얼굴로 엘리스 앞에 섰다. 그녀는 매번 주저하면서도, 끝내 등을 돌리지는 못했다. 아픔을 건너야만 다음 계절로 갈 수 있다는 걸,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엘리스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연다. 한꺼번에 열지는 않는다. 바람 한 줄기만 들어올 만큼만. 그 바람이 아프면 다시 닫을 생각으로, 괜찮다면 조금 더 열어볼 생각으로. 그녀의 봄날들은 그렇게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완전히 괜찮아지지는 않더라도, 완전히 닫히지도 않은 채로. 봄은 여전히 사무치고, 엘리스는 여전히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계절은 흐르고 그녀도 함께 흐른다. 그리고 엘리스는 이제 안다. 봄을 사랑하지 않아도, 이 계절을 통과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