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를 좋아한 적이 없다,

시인을 좋아했을 뿐이다

by Helia

나는 시를 좋아한 적이 없다. 좋아했던 건 시가 아니라 시인을 향한 마음이었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문장들이 유독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던 이유도, 그 문장들이 나를 사로잡아서가 아니라 그 문장을 살다 간 사람들의 그림자가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의 나는 시를 읽기보다 사람을 읽었다. 문장보다 이름을 먼저 외웠고, 의미보다 태도를 먼저 배웠다. 그래서 국어시간이면 자연스럽게 시구가 입 안에서 굴러다녔다. 외우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따라 나오는 말들이 있었다.
그 이름은 한용운과 윤동주였다. 누군가는 시험에 나오니까 외웠겠지만, 나는 그 반대였다. 시험에 나오지 않아도 외우고 싶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내게 사랑이 얼마나 많은 얼굴을 가질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님’이라는 단어 하나에 연인도, 조국도, 신념도 함께 담길 수 있다는 사실이 어린 마음에는 경이로웠다. 그는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장 큰 소리를 내는 사람이었다. 침묵은 도망이 아니라 선택일 수 있고, 말하지 않음은 포기가 아니라 각오일 수 있다는 걸 그의 시는 가르쳐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도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경험, 그건 처음 겪는 종류의 울림이었다.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은 또 다른 방향으로 나를 붙잡았다. 그의 시를 읽을 때면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별을 센다는 행위가 그렇게 조심스럽고, 그렇게 부끄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그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는 세상을 향해 큰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자기 자신을 향해서는 누구보다 엄격했다. 부끄러움은 숨겨야 할 감정이 아니라, 끝까지 지켜야 할 마지막 선처럼 느껴졌다. 그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의 마음이 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차갑지 않은 고독, 따뜻한 반성. 그래서 그의 시는 읽을수록 조용히 마음을 데웠다.

국어시간에 시를 줄줄 외우고 다니던 나는 종종 질문을 받았다. 어떻게 그렇게 잘 외우느냐고. 대답은 늘 애매했다. 시가 좋아서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부족했고, 공부를 잘해서라고 말하기에는 부끄러웠다. 사실은 단순했다. 그 시를 쓴 사람이 좋아서였다. 그들의 이름이 붙는 순간, 문장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하나의 삶이 되었고, 시는 작품이 아니라 태도가 되었다. 나는 그 태도를 흉내 내고 싶었다. 세상을 향해 함부로 말하지 않되, 침묵으로 회피하지 않는 법. 자신을 돌아보되, 그 자리에서 주저앉지 않는 법.
그래서 나도 시인이 되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면, 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기보다 시처럼 살고 싶었다. 말이 적어도 가벼워지지 않고, 마음이 여려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람. 사랑을 말할 때는 끝까지 사랑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는 그 감정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삶의 자세처럼 보였다.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일보다 하루를 어떻게 견디고 통과해 내는지가 더 중요해 보였다.

시간은 흘렀고, 더 이상 교과서에 시를 적어 넣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시를 대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이제는 줄줄 외우지 않고, 오래 붙잡는다. 한 구절을 마음에 올려두고 며칠씩 곱씹는다. 그럴 때마다 학창 시절의 내가 겹쳐진다. 국어책을 품에 안고 괜히 어깨에 힘을 주던 아이, 시를 잘 알아서가 아니라 그 시를 쓴 사람을 좋아해서 눈이 반짝이던 아이. 그 아이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나는 끝내 시인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더 이상 아프지는 않다. 시를 쓰는 사람이 되지 못했을 뿐, 시를 닮은 사람으로 살아가려는 마음까지 잃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말보다 침묵을 먼저 떠올리고, 확신보다 부끄러움을 먼저 점검한다. 별을 헤아리듯 하루를 돌아보고, 님을 부르듯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다. 그 습관은 학창 시절 좋아했던 두 시인이 남기고 간 흔적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기억 하나쯤은 품고 있을 것이다. 국어시간에 유독 외워지던 시, 시험이 끝나도 잊히지 않던 이름, 그 이름 때문에 괜히 더 반짝이던 문장. 우리는 시를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시를 견디며 살아낸 사람들의 자세를 동경했던 건 아닐까. 시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시를 닮은 삶을 꿈꾸는 마음. 그것이 실패라면, 나는 기꺼이 그 실패를 안고 살고 싶다. 오늘도 나는 시를 쓰기보다는, 조용히 시를 살아내는 쪽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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