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아직 떠나지 않은 시간에게

by Helia

어제 뭐 했는지 바로 떠오르는가, 그렇다면 엊그제는 어떨까. 잠깐만 생각해 보자고 하면, 우리는 대개 말을 잃는다. 분명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도 엊그제는 기억의 가장자리에서 미끄러진다. 어제의 어제, 그리고 어제. 말로는 단순한 순서인데, 머릿속에서는 셋이 서로의 얼굴을 지운 채 섞여 버린다.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어제 일도 가물가물한데 엊그제 무얼 했는지, 뭘 먹었는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기라도 써 두지 않았다면, 기억은 늘 자기 멋대로 도망친다.
엊그제는 이상한 시간이다.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다. 오늘처럼 생생하지 않고, 오래전처럼 추억이 되지도 못한다. 그래서 엊그제는 늘 중간에 남는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흐릿한 표정으로 서 있다. 나는 가끔 엊그제를 떠올리려 애쓰다가 포기한다. 기억해 보려는 순간, 오히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다. 대신 엉뚱한 장면이 스친다. 컵에 담긴 물이 식어 있던 순간, 창밖을 멍하니 보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던 시간, 괜히 휴대폰을 뒤집어 두고 한숨을 내쉬던 저녁. 그날 무슨 중요한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런 장면들만 남아 있다.

엊그제의 기억은 늘 사소한 것에 붙어 있다. 우리는 큰일을 기억할 것 같지만, 실제로 오래 남는 건 별일 아닌 순간이다. 무언가를 결정한 날보다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던 날이 더 또렷하게 남는다. 엊그제의 나는 아마 대단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짐도 없었고, 계획도 흐릿했을 것이다. 그저 하루를 버텼고, 하루를 흘려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날들이 더 자주 떠오른다. 기억은 중요함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 감정이 닿았는지, 몸이 반응했는지를 기준으로 남는다.

시간은 생각보다 불친절하다. 우리는 날짜를 정확히 세지만, 마음은 늘 늦는다. 엊그제 느꼈던 감정이 오늘에서야 제자리를 찾고, 어제 들은 말이 오늘 밤에야 무게를 얻는다. 그래서 엊그제는 이미 지난날이면서도 아직 끝나지 않은 날처럼 느껴진다. 그날 아무렇지 않게 넘긴 말 한마디가 지금의 나를 건드리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친 표정이 뒤늦게 마음에 남는다. 엊그제는 그렇게 지연된 형태로 현재에 도착한다.

엊그제를 떠올리다 보면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실감하게 된다. 빠진 장면이 많고, 연결은 어색하다. 우리는 기억을 있는 그대로 보관하지 않는다. 조금 덜 아픈 방향으로,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쪽으로 손질한다. 그래서 엊그제는 실제보다 부드러워지거나, 반대로 괜히 날카로워진다. 기억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감정의 편집본에 가깝다. 엊그제의 나는 분명 지금보다 서툴렀을 텐데, 그 모습은 희미해지고 윤곽만 남는다. 안개 낀 사진처럼, 형태는 있지만 디테일은 사라진다. 그래서 엊그제는 안전하다. 너무 생생하지 않아서, 다시 아프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엊그제는 가끔 잔인해진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순간에 돌아오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 갑자기 떠오른 문장 하나, 누군가의 말투, 익숙한 냄새. 그러면 엊그제는 어제보다 선명해진다. 마치 기억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처럼. 잊었다고 생각한 장면이 정확한 온도와 함께 되살아난다. 그럴 때 깨닫는다. 기억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숨을 고르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부르면 나오지 않았을 뿐, 필요해질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엊그제는 마음의 사각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오늘을 살아내느라 정신없고, 어제의 피로를 정리하느라 바쁜 사이, 조용히 뒤편에 선다. 크게 불러주지 않아도 스스로 존재를 드러낸다. 그날 너는 생각보다 지쳐 있었고, 사실은 조금 상처받았으며, 웃고 있었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엊그제는 내가 외면한 감정을 정확히 짚어낸다. 그래서 엊그제는 때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어느 날 엊그제를 떠올리다 문득 멈춘 적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날 저녁에 뭘 먹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를 먹었을 텐데, 기억이 비어 있었다. 대신 그날의 공기만 남아 있었다. 조금 차가웠고, 유난히 조용했다. 그 공기 속에서 나는 오래 서 있었던 것 같다. 그날의 식사는 사라졌지만, 그날의 감정은 남아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기억하는 건 사건이 아니라, 그때의 나라는 걸.

그래서 엊그제는 무섭기도 하고 다정하기도 하다. 기억하지 않아도 될 마음까지 끌어올릴까 봐 두렵지만, 동시에 오늘의 나를 덜 외롭게 만들어 준다. 혼자라고 느낄 때, 엊그제의 내가 조용히 옆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너도 그랬고, 나도 그랬고, 그때도 이렇게 애매했다고. 그런 목소리가 있다는 건 생각보다 큰 위안이다. 엊그제는 이미 지나간 나이면서도, 지금의 나를 이해해 주는 가장 가까운 증인이다.

이제는 엊그제를 억지로 붙잡지 않기로 했다. 기억은 쥐려고 하면 더 멀어진다. 대신 스스로를 느슨하게 풀어둔다. 멍하니 있는 시간, 아무 목적 없이 걷는 순간, 잠들기 직전의 흐릿한 의식. 그 틈으로 엊그제가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둔다. 그러면 기억은 꼭 필요한 만큼만 돌아온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일기를 쓰지 않아도 괜찮다. 모든 날을 기록하지 않아도 된다. 엊그제는 기록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말로 적히지 않은 시간, 사진으로 남지 않은 장면도 결국 마음 어딘가에 저장된다. 다만 파일명이 엉뚱해서 찾기 어려울 뿐이다. 언젠가 그 기억이 필요한 순간, 엊그제는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어제의 어제, 그리고 어제. 우리는 이렇게 불완전한 시간 위를 걷는다. 오늘만 간신히 붙잡고 있으면서도, 엊그제에 자주 발목을 잡힌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완전히 혼자가 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당신의 엊그제는 지금 어디쯤에 머물러 있을까. 아직 떠나지 못한 채, 조용히 당신을 부르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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