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간지러운 여름 오후

햇빛에 들킨 마음

by Helia

여름 오후에 괜히 아무 말도 못 하고 웃어본 적이 있다면, 이 이야기는 당신에게 닿을지도 모른다. 햇빛이 지나치게 밝아 마음까지 들킨 것 같았던 시간, 그늘에 서 있어도 숨을 곳이 없다고 느껴졌던 오후. 낯간지러움은 그렇게 시작된다. 누가 본 것도 아닌데 어깨가 움츠러들고, 별일 아닌 말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여름의 오후는 늘 과하게 솔직해서, 마음을 가릴 시간을 주지 않는다.

이 계절의 오후는 사람을 방심하게 한다. 공기는 늘어지고, 바람은 느리다. 매미 소리는 너무 성실해서 오히려 배경이 되고, 햇빛은 사물 위에 눌어붙듯 내려앉는다. 셔츠 소매에 스치는 빛, 골목 끝에서 튀어 오르는 먼지, 냉장고 앞에서 오래 망설이던 아이스크림의 색.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은 장면들이 이유 없이 마음을 간질인다. 낯간지러움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이렇게 사소한 감각에서 태어난다.
여름 오후의 낯간지러움은 설렘이 아니다. 들킨 마음에 가깝다. 숨기고 싶었던 생각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밖으로 튀어나온 느낌. 다른 계절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감정들이, 이 시간대에는 괜히 표정을 요구한다. 그래서 말수가 줄어들거나, 반대로 쓸데없이 많아진다. 어색한 침묵을 메우려 아무 말이나 꺼냈다가, 돌아서서 괜히 자신을 탓하게 되는 순간들. 그때의 부끄러움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다.
나는 여름 오후에 과거를 자주 떠올린다. 정확한 사건이 아니라, 공기 같은 기억들이다. 무엇을 했는지는 흐릿한데, 그때의 햇빛과 온도는 또렷하다. 괜히 웃던 얼굴, 이유 없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발걸음, 돌아오는 길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 지금 생각하면 아무 일도 아니었는데,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 마음이 분주했을까. 여름 오후의 낯간지러움은 그런 질문을 조용히 되돌려준다.

이 시간의 빛은 사람을 정직하게 만든다. 감정을 숨길 틈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여름 오후에는 관계의 온도도 쉽게 드러난다. 너무 가까워서 말하지 못한 것들, 너무 멀어져서 꺼내기 애매한 감정들. 괜히 인사를 크게 하게 되고, 웃음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진다. 눈을 피하면서도, 동시에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모순. 여름의 오후는 그런 마음의 어정쩡함을 그대로 비춘다.

낯간지러움은 불편하지만, 거짓은 아니다. 오히려 이 감정 덕분에 내가 아직 무뎌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다는 건, 아직 마음이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다. 여름 오후는 그런 사실을 굳이 말로 하지 않고, 빛으로 알려준다. 그래서 나는 이 계절의 오후를 완전히 외면하지 못한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해가 기울면, 낯간지러움도 함께 옅어진다. 바람이 조금 시원해지고, 그림자가 길어지면 마음도 제자리를 찾는다. 방금 전까지 나를 괜히 민망하게 만들던 감정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러난다. 그래서 여름 오후의 낯간지러움은 오래 남지 않는다. 붙잡으려 하면 사라지고, 흘려보내면 작은 흔적만 남긴다.

그 흔적은 대단하지 않다. 다만 하루의 결을 바꿔놓는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말하게 하고, 조금 더 천천히 걷게 만든다. 여름 오후를 지나온 날의 저녁은 괜히 차분해진다. 햇빛에 한 번 들킨 마음이, 그 뒤로는 스스로를 덜 속이게 되기 때문이다. 낯간지러움은 그렇게 하루를 정리한다.

오늘도 여름 오후는 조용히 지나간다. 특별할 것 없는 일정, 유난히 밝았던 햇빛, 이유 없이 부끄러웠던 마음. 나는 그 모든 것을 굳이 붙잡지 않는다. 낯간지러운 감정은 지나가야 제 몫을 다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다만 이 계절의 오후가 다시 올 때, 또 한 번 나를 흔들어놓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여름은 늘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살아 있게 만든다. 만약 당신도 여름 오후에 괜히 마음이 들킨 것 같았던 적이 있다면, 우리는 비슷한 속도로 이 계절을 건너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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