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린 타임캡슐

우리가 시간을 묻어두는 방식

by Helia

타임캡슐을 어디다 묻었더라. 친구와 이십 년 후에 함께 찾아보자고 약속하며 분명 흙을 덮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장소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좌표도 없고, 표식도 없다. 나무 옆이었는지, 운동장 가장자리였는지, 아니면 아무 특징 없는 공터였는지조차 흐릿하다. 사는 게 바빠서 까마득히 잊어버렸다는 말이 가장 그럴듯한 이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바쁨보다 더 정직한 원인이 있다. 우리는 잊을 준비가 된 것들부터 조용히 내려놓으며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때의 우리는 시간이 넉넉하다고 믿었다. 이십 년이라는 숫자는 아득했고, 그 아득함은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너무 멀어서 실패할 일도, 지키지 못할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종이에 적은 말들은 모두 반듯했고, 미래는 지금보다 더 크고 단단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 확신을 접어 넣고, 흙을 덮고, 발로 꾹꾹 눌렀다. 약속은 그렇게 완성된 줄 알았다. 하지만 약속이 완성되기 위해 정말 필요한 건 날짜나 장소가 아니라, 그 약속을 계속 떠올릴 여유였다는 걸 우리는 몰랐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생활 속으로 숨어들었다. 하루는 다음 날에 밀려났고, 다음 날은 또 다른 하루에 밀려났다. 해야 할 일들은 늘어났고, 기억해야 할 것들은 넘쳐났다. 그 와중에 꼭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자연스럽게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타임캡슐은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사라진 부류였다. 급하지 않았고, 당장 꺼내 쓸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잊어도 되는 약속은 그렇게 잊혔다. 누군가 일부러 지운 것도 아니고, 배신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살다 보니 그랬다.
가끔 생각해 보면, 우리가 묻었던 건 물건이 아니라 태도였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자신을 대하는 방식, 미래를 바라보던 눈빛, 지금보다 훨씬 가볍게 약속을 믿던 마음. 타임캡슐을 잊어버렸다는 건, 그 마음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렸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후회가 남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상할 만큼 담담하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다른 속도로 살아왔고, 다른 무게를 견디고 있으니까.

어른이 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미래는 기다려주는 쪽이 아니라, 먼저 달아나는 쪽이라는 것. 우리가 열어보기로 한 날짜는 다가오기도 전에 다른 일정들에 덮여 버린다. 약속은 지키지 않아서 깨지는 게 아니라, 기억하지 못해서 흐려진다. 그래서 타임캡슐은 종종 열리지 않는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결말일지도 모른다.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땅에 무언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시간을 남긴다. 휴대전화 메모장에 적어 두고 잊어버린 문장들, 끝내 보내지 않은 메시지, 서랍 깊숙이 넣어 둔 봉투 같은 것들. 그것들은 언젠가 열어보겠다는 약속조차 없다. 다만 그 시점의 내가 분명히 존재했다는 흔적만 남긴다. 거창한 다짐도, 미래를 향한 선언도 없다. 대신 그날의 공기와 온도, 잠깐의 망설임 같은 것들이 들어 있다.
생각해 보면, 타임캡슐이 꼭 땅속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기억 속에 있어도 되고, 글 한 줄에 숨어 있어도 된다. 중요한 건 그 캡슐이 미래를 압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드시 성공했는지, 약속을 지켰는지 묻지 않는다. 그저 확인한다. 여기까지 잘 왔는지, 여전히 살아 있는 쪽에 서 있는지. 그래서 나는 예전의 타임캡슐을 찾지 않기로 했다. 찾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찾지 않아도 이미 열어본 셈이기 때문이다.

그 친구와의 약속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연락처조차 바뀌었을지도 모르고, 서로의 하루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의 약속이 무효가 되는 건 아니다. 함께 흙을 덮던 순간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 기억은 지금의 나를 어딘가 더 단단하게 만든다.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약속 덕분에 우리는 한때 미래를 믿는 사람이었다.
타임캡슐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은, 결국 잘 살아왔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매일을 버티느라 바빴고, 눈앞의 시간을 감당하느라 과거의 좌표를 들여다볼 틈이 없었다는 뜻이니까. 모든 기억을 끌어안고 살 수는 없다. 어떤 것들은 흙 속에 남겨두어야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잊힌 타임캡슐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무엇이 묻혀 있었는지 몰라도, 그 위를 지나온 시간만큼은 분명히 남아 있으니까.


언젠가 우연히 그 자리를 다시 지나칠지도 모른다. 공터가 되었을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건물이 들어섰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타임캡슐은 꺼내는 순간보다 묻는 순간에 이미 역할을 다한다. 미래를 믿어보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선택, 그 잠깐의 용기.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사는 게 바빠서 잊어버린 게 아니라, 사느라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날의 약속은 끝내 헛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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