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아픈 채로 머물러도 되는 밤

바늘을 들지 않은 선택

by Helia

아무것도 끝내지 않았기 때문에,
이야기는
다음 밤으로
조용히 이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준비를 가장 먼저 알아챈 건
미미였다.
말랑숲의 밤은 늘 조심스러웠지만,
오늘은 그 조심스러움에
아주 얇은 결이 하나 더해져 있었다.
바느질방의 공기가
어제보다 조금 느리게 움직였다.
시간이 흘렀다기보다
밤이 스스로를 한 번 더 접은 느낌이었다.

미미는 작업대 위에 앉아
꼬리를 몸 쪽으로 말았다.
바늘을 들지 않은 밤에도
손끝은 늘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와 시작은
항상 같은 순간에 오지 않는다는 걸
미미는 알고 있었다.

여우는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어제와는 달랐다.
의자에 몸을 맡기지 않았고
어깨를 움츠리지도 않았다.
자신의 무게를
스스로 지탱하는 쪽으로
자세가 조금 이동해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에는
쥐는 힘이 없었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이
이제는 덜 불안해 보였다.

미아는 창가로 다가가
불을 한 단계 낮췄다.
밝히기 위한 빛이 아니라
겹치지 않게 두기 위한 빛이었다.
그 아래에서
바늘과 실이 든 상자는
어제와 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지만
오늘은
뚜껑이 아주 조금 열려 있었다.
미미는 그 틈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아직은
열어두는 것만으로 충분한 밤이었다.

여우의 시선이
상자에 잠시 머물렀다.
어제는
그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눈빛이었다면
오늘은
달라졌다는 걸 인식하는 눈빛이었다.

“어제랑 조금 달라요.”

여우의 말은 낮았고
확인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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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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