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바늘을 들기로 한 밤

실이 먼저 말을 건 밤

by Helia

말랑숲의 밤은
오늘도 결론을 서두르지 않았다.
어제 남겨둔 여백 위에
오늘의 숨을 올려두고
그 위에 다시
내일을 놓기 위해
시간을 조용히 접어두었다.
그리고 미미는 알고 있었다.
바늘은 아직 움직이지 않았지만,
언제 꺼내야 할지는
이미 밤이 알려주고 있다는 걸.

그 밤, 미미는 처음으로 바늘을 들었다.
기다림이 끝났다는 신호는
큰 소리로 오지 않았다.
말랑숲의 바느질방은 여전히 고요했고,
등잔불은 전날과 다르지 않게 흔들렸다.
다만 공기의 결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미미의 앞발 아래 놓인 천이
이제는 ‘기다리는 것’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으로
아주 미세하게 바뀌어 있었다.

미미는 바늘을 들기 전
숨을 한 번 들였다.
고양이의 숨은 소리가 없지만
이 방에서는
소리 없는 숨조차
실처럼 남았다.
미미는 그 숨을
서두르지 않고
앞발 안쪽으로 모았다.
바느질은 언제나
손보다 숨이 먼저 시작되는 일이었다.

천은 미미의 앞발 아래에서
얌전히 펼쳐져 있었다.
찢어진 자리도,
뚜렷한 상처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이어져야 할 공백이 있었다.
미미는 그 공백을
억지로 메우지 않기로 했다.
바느질은
구멍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떨어져 있던 것들을
같은 방향으로
닿게 하는 일이었으니까.

여우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고
손가락은 아무것도 쥐지 않았다.
무언가를 붙잡지 않는 연습을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계속하는 손이었다.
여우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미미의 바늘이
이제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눈으로 먼저 알아챘다.
그 눈빛에는
재촉도 기대도 없었다.
다만
지금 이 밤을
믿어보겠다는 조심히 있었다.

미미는 여우를 보지 않았다.
대신 천의 결을
앞발로 한 번 더 쓸어내렸다.
천은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미미는 실을 당겼다.
너무 팽팽하지 않게,
너무 느슨하지 않게.
딱 ‘견딜 만큼’만 남겨두는 힘.
그 힘이야말로
미미가 가장 잘 아는 감각이었다.

바늘이 천을 뚫었다.
툭, 하고
아주 작은 감촉이
앞발 끝에 전해졌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방 안의 공기는
그 순간
조금 단단해졌다.
미미는 한 땀을 지나
다시 실을 당겼다.
실은 짧은 호를 그리며
빛을 머금었다가
천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여우는 그 움직임을 보며
숨을 한 번 고르게 내쉬었다.
그 숨은
무언가를 참아내는 숨이 아니었다.
이제는
움직임을 믿어보려는 숨이었다.
여우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의 힘을 조금 풀었다.
몸이 먼저
괜찮다고 판단한 반응이었다.

“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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