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의 기억이 목소리에 닿는 순간
오늘, 그녀는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다음 목소리를 듣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해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꿈에서 마주치는 남자가 누구인지. 그 얼굴을 처음 본 날부터, 아니 어쩌면 얼굴을 보기 전부터. 어떤 기억은 이미지보다 먼저 감각으로 도착한다. 이름이 입술에 닿기 전에, 마음이 먼저 알아보는 방식으로.
이헌.
그 이름은 해윤에게 낯설지 않았다. 낯설지 않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살갗 가까운 곳에서부터 익숙했다. 손끝이 기억하고, 숨이 기억하고, 어떤 계절의 공기까지 기억하는 이름. 해윤은 전생의 기억을 ‘처음 떠올린’ 것이 아니었다. 이미 가지고 있었다. 다만 현실의 언어로 꺼내는 순간마다, 그 기억은 조금씩 다른 결을 내며 흔들렸고, 흔들림은 늘 대가를 동반했다.
잠을 자면 꿈은 문이 되었다.
열쇠를 쥔 채로 문 앞에 서 있는 기분. 들어갈 수 있지만, 들어갔다 나오면 무엇인가를 잃는 기분. 해윤은 그 문을 여러 번 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헌은 같은 눈빛으로 있었다. 기다렸다는 표정. 오래전에 이미 약속해 둔 사람처럼.
해윤이 사무실을 찾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막연한 호기심이 아니라 확인. 감정이 아니라 흔적. 기억이 현실에 남긴 찍힘. 그녀는 믿고 싶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이 지금의 시간에까지 손을 뻗을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봐 버렸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정확한 일치들. 같은 문장, 같은 숨, 같은 침묵의 길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녹음된 목소리’와 겹쳐질 때마다, 해윤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어제 버스에서 해윤은 앉지 않았다. 흔들리는 곳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그 확인은 성공했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떨렸지만 놓치지 않았고, 심장은 뛰었지만 도망치자고 조르지 않았다. 그 작은 성공이, 오늘을 만들어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걸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다음 날 아침, 해윤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꿈은 짧았다. 짧았지만 깊었다. 장면은 또렷했다가 흐려졌고, 흐려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마치 물속에서 빛이 흔들리는 것처럼. 이헌은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데도, 해윤은 들었다. 소리로 들은 게 아니라, 몸으로 들었다. 이 침묵이 ‘아직은 여기까지’라는 뜻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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