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냥 그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기억

by Helia

왜 어떤 사람은 좋아했다고 말하기도, 싫어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울까.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감정의 이름 하나 붙이지 못한 채, 나는 여전히 그 문장 앞에 서 있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정리된 줄 알았는데, 막상 떠올리면 말이 멈춘다. 그래서 결국 같은 문장으로 돌아온다. 너는, 그냥 그래.

처음엔 그 말이 무심하다고 느꼈다. ‘그냥’이라는 단어는 대개 마음을 낮추기 위해 쓰이니까. 애써 온도를 식히고, 기대를 덜어내기 위해 고르는 말처럼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 말이야말로 내가 너에게 남길 수 있었던 가장 솔직한 자리였다는 걸. 과장하지 않기 위해, 의미를 덧씌우지 않기 위해, 너를 있는 그대로 두기 위해 선택한 말이었다.

너는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쉽게 잊히는 쪽도 아니었다. 말이 많지도, 적지도 않았고 감정이 앞서지도, 지나치게 숨겨지지도 않았다. 늘 중간 어딘가에 머물렀다. 특별한 계기 없이 연락이 이어졌고, 특별한 이유 없이 멀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사이. 그 애매함이 오히려 오래갔다. 기대를 키울 일도, 감정을 다잡을 일도 없었으니까.

너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자주 말을 아꼈다.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왜 기분이 가라앉았는지 굳이 풀어놓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카톡 답장이 늦어도 이유를 캐묻지 않았고, 말이 짧아도 마음을 앞세우지 않았다. ‘이 사람은 원래 이런가 보다’ 하고 넘긴 선택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 태도가 배려였는지, 거리였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 시절의 나는 덜 흔들렸고, 덜 소모되었다.

너는 다정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마음을 키우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선을 긋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적당히 곁에 있었고, 필요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서 위안을 받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아픔을 남겼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 사이, 이름 붙이기 어려운 지점에서 우리는 한동안 나란히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관계를 두고 애매하다고 말한다. 애매한 건 결국 남는 게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삶을 돌아보면, 결정적인 장면보다 그런 시간들이 훨씬 많다. 확실한 사랑도, 분명한 이별도 아닌 날들. 그저 하루를 무사히 건너가게 해 준 얼굴들. 너는 그 목록 어딘가에 조용히 남아 있다.

한때는 네가 조금 더 분명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드러내거나, 방향을 정하거나, 최소한 흔들림 없는 태도를 보였다면 좋았을 거라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네가 그랬다면 우리는 더 빨리 끝났을 것 같다. 너의 흐릿함이 나를 붙잡았고, 너의 무던함이 나를 놓아주었다. 붙잡히지 않았기에 오래 남았고, 쉽게 밀려나지 않았기에 기억 속에 남았다.

너를 떠올리면 장면보다 감각이 먼저 떠오른다. 미지근한 물에 손을 담갔을 때의 온도, 해가 기울 무렵의 애매한 빛, 대화가 끝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던 공기.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살게 했던 시절. 감정이 넘치지 않아서 버틸 수 있었고, 조용했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다. 너는 그런 날들의 배경처럼 존재했다.


그래서 ‘너는, 그냥 그래’라는 말은 무심한 평가가 아니다. 그 말은 기대하지 않게 되었고, 실망하지 않게 되었으며, 억지로 의미를 만들지 않게 된 끝에서 도착한 문장이다. 많은 마음을 지나 결국 남은 가장 단순한 말. 너를 분석하지 않아도 괜찮아진 상태에서야 비로소 꺼낼 수 있는 말이었다.

지금도 비슷한 얼굴을 스치면 문득 너를 떠올린다. 반갑지도, 낯설지도 않은 이름. 다시 만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확신. 안부를 묻고, 잠깐 웃고,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질 수 있는 사이. 손을 잡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고, 놓쳐도 원망하지 않는 거리. 그게 우리였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끝내 사랑하지 않은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분명해지는 대신 흐릿함을 택했고, 깊어지는 대신 오래 머무는 쪽을 골랐다. 그래서 화려한 기억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너는, 그냥 그래.
그런데 그 말이 나를 이렇게 오래 붙들 줄은 몰랐다. 뜨거운 고백도, 극적인 이별도 아닌데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또렷해진다. 삶에서 가장 오래 남는 건, 결국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곁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걸, 너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아무 일 없던 사람이, 가장 오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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