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춥지만, 그래도 괜찮아진 이유
입춘이 왔다고 해서, 삶이 바로 따뜻해지는 건 아니었다. 달력은 성큼 앞서 가지만 몸은 여전히 겨울의 어투로 하루를 말한다. 숨을 들이마시면 공기가 먼저 이를 세우고, 바람은 아직 마음을 시험한다. 그런데도 낮의 어느 순간, 창가에 스며드는 빛은 분명히 달라져 있다. 날을 세워 내려오던 겨울의 햇살이 아니라, 손바닥을 펴면 얹힐 것 같은 온기. 그 얇고 조심스러운 빛을 사람들은 볕뉘라 부른다. 입춘의 볕뉘는 그렇게, 계절보다 마음을 먼저 흔든다.
그 볕은 늘 무심한 틈을 노린다. 커튼을 걷는 순간, 싱크대 위에 물기를 닦다 말고 고개를 들었을 때, 빨래를 널며 팔꿈치를 펴는 찰나. 의식하지 않아도 빛은 슬쩍 손목을 잡는다. 아직 두꺼운 외투를 벗을 용기는 없고, 난방을 끄기엔 밤이 겁나는 시기인데, 볕은 속삭인다. 조금만 믿어도 된다고. 그 말에 마음이 먼저 풀린다. 햇빛 앞에서 사람은 늘 방심한다. 특히 입춘의 볕뉘 앞에서는 더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
입춘 무렵이면 괜히 집 안이 부산해진다. 계절을 앞서 연습하듯, 입지 않던 옷을 꺼내고 얇은 니트를 어깨에 걸쳐 본다. 화분의 흙을 살짝 헤집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겨울 내내 눌러 두었던 물건들을 제자리에서 조금 옮긴다. 아직 바뀌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곧 바뀔 것을 미리 만져보는 마음. 볕뉘는 그 연습을 허락한다. 완전한 변화가 오기 전,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마련된 얇은 완충지처럼.
나는 이 애매한 빛을 좋아한다. 선언하지도, 고집하지도 않는 태도. 겨울을 밀어내지 않으면서도 봄을 불러오는 방식. 인생의 많은 시작이 그랬다. 완전히 준비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던 순간들. 두려움과 기대가 동시에 고개를 들던 때. 입춘의 볕뉘는 그런 마음의 결을 닮았다. 한 발은 과거에 남아 있고, 다른 한 발은 아직 오지 않은 날로 향해 있는 자세. 어정쩡하지만 가장 솔직한 서 있는 법.
볕뉘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구름에 가려졌다가, 해가 기울며 금세 자취를 감춘다. 그 짧음 때문에 더 선명해진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따뜻함보다, 잠깐 스치고 가는 온기가 더 오래 남는 것처럼. 볕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괜히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아직 남아 있는 체온을 확인하듯이. 알고 있다. 빛은 떠났고 공기는 다시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확인한다. 입춘의 볕뉘는 현실을 바꾸기보다, 현실을 견디는 태도를 바꾼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직은 춥다.
아직은 불안하다.
그런데도,
숨이 조금 편해진다.
사람은 모두 각자의 겨울을 건너고 있다. 당장 나아질 기미가 없어도, 언젠가는 달라질 것이라는 감각 하나로 오늘을 통과하는 날들. 입춘은 그 감각의 이름 같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믿어보고 싶은 마음. 볕뉘는 그 믿음을 몸으로 증명해 준다. 너의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입춘의 볕을 맞을 때마다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버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느끼던 시절, 끝이 보이지 않는 겨울 속에서도 이상하게 하루하루를 건너던 나. 그때도 분명 이런 볕뉘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모든 빛이 다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니까. 어떤 볕은 살아내기 위한 배경음처럼 스쳐 지나간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 볕 덕분에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입춘의 볕뉘는 화려하지 않다. 꽃을 피우지도,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지도 않는다. 대신 아주 사소한 것들을 조금씩 움직인다. 굳어 있던 손가락이 풀리고, 움츠렸던 어깨가 내려간다. 마음속에서 ‘그래도’라는 말이 조심스레 고개를 든다. 그래도 내일은 조금 다를 수 있다고, 그래도 오늘을 이렇게 마무리해도 괜찮다고. 그 작은 허락이 사람을 얼마나 오래 살게 하는지, 이제는 안다.
그래서 입춘이 오면 거창한 다짐을 하지 않는다. 목록을 적지 않고, 결심을 선언하지도 않는다. 대신 볕이 드는 자리에 잠시 선다. 말없이, 욕심 없이. 볕이 나를 통과하도록 내버려 둔다. 붙잡을수록 멀어지고, 흘려보낼수록 마음에 남는 빛. 볕뉘는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통과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겨울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봄은 아직 멀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입춘의 볕뉘가 있다. 완전하지 않아서 더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전, 말로 다하지 못한 희망을 가만히 품을 수 있는 순간. 오늘도 그 빛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녀간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볕이 지나간 자리에서 마음속 어딘가는 이미 조금 풀어졌다는 것을. 아직 춥지만, 그래도 괜찮아진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