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늘 서두르지 않는다
봄은 늘 서두르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바쁘게 흘려보냈다. 계절은 언제나 제 속도로 오고 가는데, 나만 앞질러 달리며 숨을 헐떡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창문을 여는 손길이 느려지고, 이유 없이 고개를 들게 되는 날이 온다. 그때 비로소 봄내음이 도착한다. 눈보다 먼저, 기억보다 앞서.
봄의 냄새는 늘 조용하다. 대단한 향이 아니라서 더 오래 남는다. 막 구운 빵에서 새어 나오는 온기, 햇빛을 머금은 아스팔트 위의 습기, 바람이 지나간 자리마다 남기는 연한 잔향. 그런 것들이 겹쳐지며 공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장면은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풀어진다. 마치 오래 닫아 두었던 서랍이 저절로 열리는 것처럼.
그 내음은 나를 자주 과거로 데려간다. 어릴 적, 봄은 지금보다 훨씬 길었다. 학교로 가는 길은 늘 같았지만, 계절이 바뀌면 풍경도 함께 바뀌었다. 겨울 동안 잠잠하던 담벼락 아래에서 풀들이 고개를 들고, 괜히 신발 끝으로 흙을 건드리며 발걸음을 늦추던 날들. 손바닥에 남던 흙냄새와 햇빛에 데워진 공기의 온기가 아직도 또렷하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모든 감각이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었다.
봄날의 시간은 느슨했다. 해야 할 일보다 미뤄도 되는 순간이 더 많았고, 오후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까지 충분히 놀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우리는 자주 멈춰 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공기가 있었고, 그 공기는 사람의 마음을 풀어놓았다. 느긋함은 게으름이 아니라, 그 계절이 허락한 방식이었다.
봄내음은 사람을 다르게 만든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장면 앞에서 발걸음을 늦추게 하고, 괜히 말수가 줄어든다. 소음이 잦아들면 마음도 함께 가라앉는다. 그래서 봄에는 생각이 많아지기보다 생각의 여백이 생긴다. 그 틈으로 오래된 얼굴들이 스며든다. 한때 자주 웃던 사람, 지금은 연락처 속에만 남은 이름, 봄날의 햇빛처럼 스쳐 간 인연들.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릿하기보다는, 조용한 온기가 먼저 번진다.
어른이 되고 나서 맞이하는 봄은 조금 다르다. 일정은 빽빽해지고, 하루는 늘 빠듯하다. 달력은 숨 돌릴 틈 없이 넘어가고, 마음은 종종 앞서간다. 그럼에도 봄은 여전히 느긋한 얼굴로 다가온다. 외면해도 포기하지 않고, 일상 어딘가에 슬쩍 자리를 잡는다. 출근길에 스치는 바람,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의 햇빛, 잠깐 열린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공기. 봄내음은 그렇게 말을 건다. 잠시 멈춰도 괜찮다고.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날도 있고, 흘려보내는 날도 있다. 어떤 날은 향기를 맡고도 그냥 지나친다. 바람은 지나가고, 나는 제자리에서 속도를 늦추지 못한다. 그러다 이유 없이 마음이 풀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커피가 식어 가는 걸 바라보며 창밖을 오래 바라보는 오후, 해야 할 일을 잠시 내려놓은 저녁. 그제야 봄내음이 제대로 도착한다. 오래 기다렸다는 듯, 말없이 어깨에 손을 얹는다.
봄의 기억은 대체로 소리가 작다. 큰 사건보다 작은 감각으로 남는다. 바람에 흔들리던 커튼, 햇빛 속에서 반짝이던 먼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맑은 기분. 그런 장면들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바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이 복잡해질수록 더 선명해진다. 그래서 봄내음은 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처럼 느껴진다. 건너는 데 힘이 들지 않고, 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다리.
느긋한 봄내음의 추억은 나를 다그치지 않는다. 잘 해내지 못한 날에도, 충분히 애쓰지 못했다고 느끼는 날에도, 그 내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계절이 그랬듯, 기다려 준다. 모든 변화는 서서히 오고,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겨울이 아무리 길어 보여도 끝이 있듯, 봄은 늘 자기 차례에 맞춰 찾아온다고.
그래서 나는 해마다 봄을 기다린다. 거창한 계획 없이, 특별한 다짐 없이. 느긋한 내음 하나면 충분하다. 그것이 나를 다시, 내가 나였던 자리로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바쁘게 흘러온 시간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숨을 고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봄내음은 그렇게 기억이 되고, 기억은 다시 나를 살게 한다. 느긋하게, 그러나 분명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