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킴의 한가운데에서
요즘 나는 책상 앞에 앉아도 좀처럼 첫 문장을 건너지 못한다. 할 말은 분명히 많다. 머릿속은 늘 북적이고, 감정은 제각기 다른 색으로 번져 있다. 그런데 막상 쓰려고 하면 길이 끊긴다. 지도는 펼쳐져 있는데 목적지가 사라진 느낌이다. 이런 상태를 사람들은 글태기라고 부른다지만, 그 단어 하나로는 지금의 나를 다 설명하기 어렵다. 태기라기엔 너무 또렷하고, 슬럼프라기엔 너무 생생하다. 나는 멈춘 것이 아니라, 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내 안은 여러 색실을 한 움큼 가져다 엮어 놓은 상자 같다. 분홍은 아직 남아 있는 애정이고, 파랑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며, 노랑은 막연한 기대다. 보랏빛은 쉽게 말로 옮기지 못하는 외로움이고, 초록은 여전히 놓지 못한 희망이다. 그 실들이 차분히 정리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는 조급하게 전부를 동시에 붙들었다. 한 가닥씩 고르지 않고, 한 번에 움켜쥐었다. 그 결과는 뻔했다. 매듭은 매듭을 부르고, 방향은 뒤틀렸다. 손을 댈수록 더 복잡해졌다.
풀어보겠다고 나름의 방법도 써봤다. 밀가루를 살살 뿌리듯 숨을 고르고, 산책을 하고, 음악을 틀고, 괜히 책장을 넘겼다. 마찰을 줄이면 부드럽게 풀릴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더 엉켰다. 밀가루는 고르게 흩어지지 못하고, 습기를 만나 덩어리 졌다. 하얗게 쌓인 가루 사이에서 실은 더 단단히 붙어버렸다. 애쓴 흔적만 남고, 형태는 점점 흐려졌다. 내가 뭔가를 정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또 다른 층을 쌓고 있었던 셈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문제는 실이 아니라 나의 태도였다. 나는 한 번에 다 풀어야 한다고 믿었다. 오늘 안에, 지금 이 자리에서, 완벽한 문장으로 정리해야 한다고. 마치 미완성의 상태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글은 늘 미완성에서 시작된다. 매끈한 문장은 초안 위에 덧입혀지는 옷일 뿐이다. 나는 초안도 쓰기 전에 이미 완성도를 걱정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문장을 평가하고, 채점하고, 탈락시켰다.
예전의 나는 조금 더 가벼웠다. 비가 오면 창문에 맺힌 물방울을 적었고, 카페 구석에 앉아 누군가의 눈빛을 훔쳐 적었다. 한 장면이면 충분했다. 그 장면이 마음에 남는다면 그걸로 됐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장면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더 밀도 있어야 하고, 더 단단해야 하고, 더 깊어야 한다는 기준을 스스로 세웠다. 내가 나에게 편집자가 되었다. 원고를 쓰기도 전에 빨간 줄을 긋는다. 이건 상투적이야, 이건 약해, 이건 부족해. 그러니 문장이 태어나기도 전에 숨이 막힌다.
어쩌면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증명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계속 쓰고 있다는 사실로, 계속 성장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멈추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래서 멈추는 순간이 두려웠다. 하루라도 쓰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았고, 한 편이라도 만족스럽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글은 쉼이 아니라 시험이 되었다. 나는 매번 시험장에 앉은 사람처럼 긴장했다.
이상한 건, 완전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는 점이다. 정말로 다 타버린 상태라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을 것이다. 괴롭다는 건 아직 미련이 있다는 뜻이고, 미련이 있다는 건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여전히 글을 좋아한다. 문장이 이어질 때의 감각, 마음이 한 줄로 정리될 때의 선명함, 아무도 모르는 나의 세계가 종이 위에 놓일 때의 안도. 그걸 알기에 더 조급해지는지도 모른다.
엉망이 된 듯 보이지만, 어쩌면 이건 새로운 무늬가 생기기 직전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실이 완전히 정렬되어 있을 때는 새로운 조합이 나오지 않는다. 한 번 뒤섞이고, 낯설게 얽혀야 다른 색이 보인다. 나는 지금 그 과정을 지나고 있는 것 아닐까. 질서를 사랑하면서도 무질서를 견뎌야 하는 시간. 명확함을 추구하면서도 모호함을 통과해야 하는 시기.
그래서 나는 생각을 조금 바꾸기로 했다. 실을 한 번에 풀지 않겠다고. 오늘은 한 가닥만 꺼내 보겠다고. 거창한 구조 대신 한 문장만 붙들겠다고. “나는 지금 엉켜 있다.” 그 한 문장으로 시작해 보겠다고. 그다음은 자연히 따라오게 두겠다고. 무늬를 설계하지 않고, 실의 결을 따라가 보겠다고.
엉킨 실을 거칠게 잡아당기면 더 조여든다. 대신 방향을 바꿔 조금씩 숨을 틔워주면 의외로 쉽게 풀린다. 나에게도 그런 손길이 필요하다. 채찍이 아니라 여백, 압박이 아니라 허용. 완성보다 지속, 성취보다 감각. 내가 왜 쓰기 시작했는지, 무엇을 좋아했는지, 그 초심을 다시 만져보는 일.
아마도 글태기라는 말은 잠시 숨 고르는 시간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멈춘 것처럼 보이지만, 안에서는 조용히 재정렬이 일어나는 시기. 겉으로는 엉켜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결을 찾고 있는 과정. 나는 그 시간을 지나고 있다. 조급해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여전히 불안해하는 채로.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본다. 엉킨다고 해서 끊어진 것은 아니라고. 밀가루를 털어내고 다시 실을 만져보면, 손끝에는 여전히 온기가 남아 있다고. 글은 도망가지 않는다. 다만 기다릴 뿐이다. 내가 힘을 빼고, 다시 천천히 숨을 고를 때까지.
오늘의 나는 완성된 작품 대신 이 고백 하나를 남긴다. 나는 지금 길을 잃은 듯 서 있지만,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다. 여러 색이 뒤엉킨 상자 앞에서, 나는 여전히 실을 만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손길이 이어지는 한, 언젠가 다시 무늬는 생겨날 것이다. 엉킨 계절을 지나야 비로소 새로운 직조가 시작된다는 걸, 나는 결국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