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게 아니라, 가라앉아 있던 시간
종이가 아니라 내가 먼저 말라 있었다. 문장을 꺼내려하면 손이 아니라 몸이 멈췄다. 설이 끝나고 한 주만 더 쉰다고 했던 말은, 계절처럼 짧을 줄 알았는데 계절을 건너버렸다.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겨놓고, 나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작년에는 피부가 먼저 무너졌다. 올해는 눈이 무너졌다. 눈이 쉽게 젖었고, 금방 지쳤다. 몇 줄 읽다가도 문장이 번졌다. 글자들이 물에 젖은 잉크처럼 흐려졌다. 읽는다는 건 눈으로 버티는 일인데, 그 버티는 힘이 사라지니까 문장도 같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더 깊은 데서, 몸이 가라앉고 있었다. 빈혈과 함께 페리틴 수치가 떨어지면서, 몸 안의 불이 꺼진 것처럼 힘이 빠졌다. 숨은 쉬는데 산소가 부족한 느낌, 머리는 깨어 있는데 몸은 따라오지 않는 상태.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하루를 다 쓴 사람처럼 지쳐 있었다.
문제는 의지가 아니었다. 연료가 없었다.
입학을 했다. 수업을 듣고 과제를 했다. 해야 할 일은 일정처럼 밀려왔고, 나는 그 흐름에 떠밀려 갔다. 예전에는 하루 끝에 글을 쓰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자리는 점점 더 커졌다.
하루를 놓치면, 그다음 하루는 더 멀어진다.
이틀이 지나면, 돌아가는 길이 희미해진다.
사흘이 지나면, 시작 자체가 낯설어진다.
나는 글을 그만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잠시 글에서 밀려난 사람일 뿐이다.
이상하게도 글을 쓰지 않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고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시끄러웠다. 쓰지 못한 문장들이 쌓이고, 시작하지 못한 글들이 떠다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닌데,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면 이제 써야지.’
그 생각이 들수록 손은 더 멀어졌다. 쓰려고 앉으면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나오지 않는 문장을 붙잡고 있는 시간은, 마치 물 없는 컵을 계속 기울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데, 계속 쏟아보려는 상태.
그 시간은 조용히 사람을 닳게 만든다.
결국 나는 인정했다. 글이 막힌 게 아니라, 내가 비어 있었다는 걸. 눈이 지치면 문장이 흐려지고, 몸이 지치면 생각이 끊긴다. 읽지 못하면 쓸 것도 줄어든다. 그 상태에서 글을 쓰겠다는 건, 이미 식어버린 불 위에 물을 끓이겠다는 것과 비슷했다.
불이 없으면, 끓지 않는다.
두 달이라는 시간은 길었다. 그런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멈춰 있지는 않았다. 몸은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버티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었고, 해야 할 일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붙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시간을 비어 있는 시간으로 취급했다. 글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그 시간을 통째로 지워버렸다.
하지만 비어 있지 않았다.
눈이 오래 버텨주지 못할 때, 나는 짧은 생각들을 붙잡았다.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잡히지 않는 감정들이 잠깐씩 떠올랐다.
눈이 피곤하면, 생각이 먼저 흐려진다.
몸이 가라앉으면, 문장도 같이 가라앉는다.
그 문장들은 종이에 남지 않았지만, 어딘가에는 쌓여 있었다. 나는 그걸 굳이 끌어올리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그 정도가 전부였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조용하고도 큰 불안은, 다시 쓸 수 있을지 모르는 순간이다. 나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예전처럼 이어질까, 예전처럼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막상 다시 문장을 꺼내보니,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속도가 달라졌다. 예전처럼 한 번에 밀어붙이진 못한다. 대신 끊어서, 이어서, 겨우 연결한다.
지금의 나는 다른 방식으로 쓴다.
눈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몸은 쉽게 지친다. 하루의 밀도도 예전 같지 않다. 그렇다면 쓰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길게 쓰지 않는다. 짧게 붙잡는다. 많이 읽지 못하면, 지금의 상태에서 바로 꺼낸다. 준비를 줄이고, 시작을 앞당긴다.
지금은 완성보다, 끊어지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
돌아보면 이 두 달은 멈춘 시간이 아니다. 물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시간이다. 겉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에서는 조용히 방향이 바뀌고 있던 시간.
나는 그걸 이제야 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다는 말을 크게 하지 않는다. 돌아왔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말은 너무 크고, 지금의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
대신, 오늘 가능한 만큼만 쓴다.
다섯 줄이면 다섯 줄.
열 줄이면 열 줄.
그렇게 이어 붙인다.
느리다. 하지만 멈춰 있지는 않다. 멈춘 것과 느린 것은 다르다. 멈춘 사람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지만, 느린 사람은 결국 쌓는다.
다시 잘 쓰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대신, 오늘 쓸 수 있는 만큼만 쓴다.
그게 지금의 나에게 허락된 속도다.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