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할수록 내가 무너진다

그 감정은 결국 나를 향하고 있었다

by Helia

나는 한 사람을 꽤 오래 미워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였다.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에도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이상한 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흐려질 줄 알았던 감정이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는 사실이다. 잊히는 대신, 익숙해졌다. 미워하는 마음이 일상의 일부처럼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이유가 분명했다. 그 사람이 했던 말 한마디, 아무렇지 않게 던진 표정, 그때의 공기까지도 또렷하게 기억났다. 내가 왜 상처받았는지, 왜 분노했는지 설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감정은 정당하다고 믿었다. 나는 피해자였고, 그 사람은 잘못한 쪽이었다. 그 구도는 단순했고, 나는 그 안에서 꽤 오랫동안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이유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있었던 일이었는데, 그 감정만큼 선명하지 않았다. 대신 남아 있는 건 감정 자체였다. 이유 없이 끓어오르는 짜증, 아무 상관없는 순간에도 불쑥 떠오르는 얼굴, 그리고 그때마다 반복되는 감정의 소모. 그 사람은 내 하루에 존재하지 않는데, 나는 계속 그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상했다. 이미 끝난 일이었다. 더 이상 관계도 아니었고, 다시 마주칠 일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내 안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나는 혼자서 계속 그 사람과 싸우고 있었다. 이미 끝난 장면을 반복 재생하면서, 매번 같은 감정을 다시 꺼내 쓰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의심이 들었다. 이 감정이 정말 그 사람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붙잡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면, 완전히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다. 관심조차 없는 사람에게는 화도 나지 않는다. 미움은, 어쩌면 남아 있는 감정의 다른 형태일지도 모른다. 기대가 무너졌거나, 믿음이 깨졌거나, 혹은 좋아했던 시간의 잔여물이 남아 있거나. 그래서 더 질긴 것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끊어지지 못한 감정이, 방향만 바뀐 채 남아 있는 상태.
나는 그 사실이 조금 불편했다. 내가 여전히 그 사람에게 어떤 형태로든 묶여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미워하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그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무 상관없는 순간에도, 무의식처럼 스며들었다. 그 사람은 이미 내 삶에서 빠져나갔는데, 나는 그 사람을 내 안에 계속 붙잡고 있었다.
그건 생각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미움은 에너지를 많이 쓴다. 감정을 끌어올리고, 기억을 꺼내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럴 때마다 하루가 조금씩 닳는다. 별일 없던 날도, 괜히 지친 날이 된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피곤한 이유가, 그 감정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래서 어느 날,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졌다. 이 감정이 지금 나에게 필요한가.

대답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다. 아니었다. 이 감정은 나를 보호하지도 않았고, 나를 성장시키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묶어두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사람과, 지나간 시간에.

그렇다고 해서, 당장 미움을 버릴 수는 없었다. 감정은 결심으로 정리되는 게 아니니까. 대신, 다른 방식을 선택했다. 붙잡지 않는 것. 떠오르더라도 따라가지 않는 것. 감정이 올라오면, 거기서 한 발짝 떨어지는 것.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여전히 불쑥 떠올랐고, 여전히 감정이 따라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멈췄다. 더 깊이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예전처럼 끝까지 끌고 가지 않고, 중간에서 내려놓는 연습을 했다. 생각보다 자주 실패했고,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래도 조금씩 달라졌다.

어느 날은, 그 사람이 떠올랐는데 아무렇지 않았다. 감정이 올라오지 않았다기보다, 올라와도 금방 가라앉았다. 파도가 예전처럼 세게 치지 않았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물결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이 낯설어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때 알았다. 아, 이게 줄어드는 거구나.

미움을 완전히 없애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기억이 있는 한, 감정의 흔적은 남는다. 하지만 그 흔적이 나를 계속 흔들 필요는 없다. 나는 더 이상 그 감정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쓰기에는, 내 하루가 생각보다 아까웠다.
그래서 조금씩 방향을 바꿨다. 감정을 없애려 하기보다, 다른 곳에 쓰기로 했다.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들, 나를 조금 덜 흔들리게 하는 것들. 산책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들. 그런 시간들이 쌓이면서, 내 안의 공간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그 사람의 기억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다른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세한 변화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확실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그 사람이 중심이 아니었다. 내 삶의 중심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있었다.

생각해 보면, 미움을 내려놓는 일은 상대를 위한 선택이 아니다. 나를 위한 선택이다. 그 사람을 이해해서도 아니고, 용서해서도 아니다. 단지 더 이상 그 감정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서다. 내 에너지를, 내가 선택한 방향에 쓰고 싶어서다.

이건 거창한 결심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반복이다. 떠올라도 붙잡지 않는 것. 감정이 올라와도 머무르지 않는 것. 그걸 계속 반복하는 것. 그렇게 조금씩, 감정의 농도가 옅어진다.

나는 여전히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않다. 가끔은 예전처럼 감정이 올라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감정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얼마나 지치는지. 그래서 다시 돌아온다.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스스로를 끌어낸다.

미워하는 건 쉽다. 한 번 시작하면 오래 붙잡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나를 소모시키는 방식이다. 내가 나를 갉아먹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

더 이상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내 시간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 시간에, 나를 회복시키기로 했다. 이미 지나간 사람 대신, 지금의 나를 더 선명하게 바라보기로 했다.
어쩌면 그게 전부일지도 모른다. 미워하지 않으려 애쓰는 게 아니라, 더 이상 미워할 이유를 내 안에서 줄여가는 것. 그렇게 서서히, 감정의 자리를 비워두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 다시 나를 채워 넣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