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 한 송이와 빈자리

그만해, 얘한테 왜 그래

by Helia

중학교 2학년, 어느 흐린 봄날이었다.
나는 일진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날도 역시 돈을 뜯기고 있었고,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아무 말 없이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다가와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해. 얘한테 왜 그래."

나 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던, 3학년 언니였다. 이름이… 현미였던가, 현아였던가.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적당히 날카롭고, 적당히 따뜻했다.

그날 이후, 언니는 나에게 종종 말을 걸어왔다. 처음엔 그냥 인사 정도였는데, 이상하리만치 자주 마주쳤다. 만화방, 도서관, 서점, 그리고 학교 운동장 한쪽, 천막 그늘진 계단 아래까지. 마치 우리 둘만의 은밀한 동선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 책 읽어봤어?"
언니는 책을 참 좋아했다. 말수는 많지 않았지만, 책을 이야기할 땐 눈빛이 반짝였다. 좋아하는 구절엔 밑줄이 쳐져 있었고, 책갈피에는 손글씨로 쓴 문장이 끼워져 있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말들은 종이 위에 내려앉아야 살 수 있다』
그건 언니가 나에게 처음 건넨 책 속에 끼워져 있던 문장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책을 넘겼고, 언니는 멀찍이 앉아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언니에게 빌린 책을 돌려주려 교실로 갔다.
3학년 교실은 평소처럼 시끌벅적하지 않았다. 언니의 자리에 조용히 놓인 국화 한 송이.
그리고 그 주변에서 울고 있는 반 친구들 몇 명.
무언가 이상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너 몰랐어? 현아 언니… 어젯밤에…"
누군가 속삭이듯 말했다.

학교 옥상에서 투신했다는 말은, 공기보다 먼저 가슴에 박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언니의 빈자리를 바라봤다. 아직도 따뜻할 것만 같은 그 책상, 교복 위로 조심스레 올려진 꽃 한 송이, 그리고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 침묵.

그날 이후, 나는 언니의 책들을 되돌려주지 못했다. 돌려준다고 약속했던 그 책은 아직도 내 책장 맨 안쪽에 그대로 있다. 간혹 꺼내어 책갈피를 펼치면, 그 손글씨가 아직 그대로다.

『혼자 견디는 건, 용기가 아니라 고통일 때가 많아.』

언니는 그 말을 누구에게 하고 싶었던 걸까.
왜 나에게 그토록 책을 건넸던 걸까.
나를 통해, 외로운 아이를, 거울처럼 본 건 아니었을까.

나는 그날 이후 옥상을 자주 올려다보게 되었다.
누군가를 끝으로 몰아붙인 자리가 얼마나 높은지, 얼마나 외로웠을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여전히 생각한다. 언니가 마지막으로 올려다본 하늘은 어떤 색이었을까.
무언가가 '그만두자'라고 말했을 그 순간, 언니는 정말 아무 말도 남기지 못했을까.

우연히 자주 마주쳤던 언니,
책으로 마음을 나눴던 언니,
그리고 어느 날, 조용히 사라진 언니.

나는 아직도 언니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언니가 남긴 책은, 문장은, 그리고 조용한 따뜻함은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그건 언니의 존재가 진짜였다는 증거다.

그리고 가끔, 누군가 외로워 보일 때, 나는 언니가

내게 했던 것처럼
작은 책 한 권을 건네고 싶어진다.
"이 책, 읽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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