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냉동실
냉동보관함처럼 생긴 금속 캐비닛 앞에서, 민호는 조심스럽게 장갑을 낀 손으로 손잡이를 돌렸다. 낮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안에서 차가운 김이 퍼져 나왔다. 내부에는 겹겹이 쌓인 서류철과 함께, 밀봉된 USB 드라이브 몇 개가 있었다. 서류에도 냉기가 스며든 듯, 아진의 손끝이 저릿했다. 병원 기록이라기엔 이상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오래된 혈흔 자국처럼 보이는 얼룩이 종이 끝자락에 스며 있었다.
“병원 기록이 이렇게 보관될 리가 없잖아요... 이건, 누군가 숨긴 거야.”
민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진은 USB 하나를 꺼내 들었다. 표면은 아무런 표식도 없었지만, 누군가 손톱으로 긁은 듯한 흠집이 있었다.
“‘나를 봐’... 그렇게 보였지만, 다시 보면 그저 스크래치일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어쩐지 그것이 지금껏 본 그 어떤 문장보다 더 또렷하게 느껴졌어요.”
“가져가자.”
둘은 일부만 챙기고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병원을 빠져나오는 길 내내, 아진의 심장은 규칙적으로 뛰지 않았다. 불안, 호기심, 그리고 어쩌면 분노. 감정이 뒤섞여 그녀의 속을 천천히 잠식했다. 주차장 쪽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걸어갈수록 그녀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고, 등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고 있는 듯한 섬뜩한 기분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차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말없이 USB를 쥐고 있는 아진의 손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민호는 운전대를 잡은 채 한참을 말이 없었다. 병원을 빠져나왔다는 안도감보다, 이제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사무소로 돌아온 뒤, 두 사람은 입도 뻥끗하지 않은 채 노트북 앞에 앉았다. USB를 꽂자 폴더 하나가 떴고, 암호를 요구하는 창이 팝업처럼 튀어 올랐다.
“암호화되어 있네요. 복호화 프로그램 돌려볼게요. 시간 좀 걸릴 수도 있어요.”
민호가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프로그램을 구동시키는 사이, 아진은 서류철을 펼쳤다. 바랜 종이에서는 오래된 수술실 냄새 같은 게 풍겼다. 살균제와 금속이 뒤섞인 기묘한 냄새.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 장씩 넘겨가며 자료를 읽었다. 거기엔 이름 없는 환자들의 얼굴 사진이 몇 장 있었다. 전신 마취에 들어가기 직전 찍은 듯한, 무표정하고 공허한 얼굴들. 그리고 그 옆에는, 불과 두 시간 차이로 찍힌 듯한, 노인의 얼굴 사진이 덧붙어 있었다.
“진짜였네…”
그중 한 장, 누군가 얼굴을 완전히 찢어놓은 사진을 본 아진은 숨을 삼켰다. 입을 틀어막은 채,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르는 듯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군가 그 사진을 찢기 전, 얼마나 절박했을까. 그것조차 기록으로 남겨졌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이건… 시술이 아니라, 실험이야. 사람을 대상으로 한, 치밀하게 계획된 실험.”
잠시 후, USB의 암호가 풀리며 하나의 영상이 실행됐다. 푸르스름한 형광등 아래, 수술대에 누워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 영상 속에서 마취가 시작되자, 금속 장비 하나가 그녀의 얼굴 주변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피부 대체 프로그램 작동.”
기계음이 스피커를 통해 무심하게 울렸다.
아진은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느꼈다.
“이거... 인위적 노화?”
“아니, 뭔가를 덧씌운 거야. 그녀의 진짜 얼굴 위에, 다른 얼굴을.”
잠시 후 깨어난 여자는 거울 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화면 밖에서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
“기억도 초기화됐을 텐데 왜 이러지?”
“빨리 퇴원 조치해. 기록은 삭제했어.”
그녀는,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잃은 채, 다른 얼굴로 살아가게 된 거였다.
아진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뒷목이 서늘했고,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눈앞에 떠오른 건, 그날 병원 창가에 홀로 앉아 있던 의뢰인의 노화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진 속, 시술 전 그 여자의 평범한 얼굴이었다. 빼앗긴 일상. 찢긴 자아. 이름도, 나이도, 얼굴도 통째로 바뀐 삶.
“그러니까, 이 병원은... 단순한 미용 시술소가 아니었던 거야.”
민호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긴 침묵 끝에 낮게 말했다.
“이 사건, 생각보다 훨씬 크네요. 우리, 선 넘은 걸지도 모르겠어요.”
아진은 다시 USB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어. 그 얼굴을 가진 채로 살아가야 했던 사람을 위해.”
USB 속 마지막 폴더. 'Phase II – Candidate List'.
폴더를 여는 순간, 화면에는 여러 인물들의 이름과 사진이 나타났다. 이름 아래에는 간략한 신체 정보와 사진, 그리고 '적합' 혹은 '보류'라는 상태가 기입돼 있었다. 대부분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중, 너무 익숙한 이름 하나가 아진의 눈에 들어왔다.
“이건… 내 이름?”
그녀의 심장이 찬물에 빠진 듯, 한순간 멎는 것 같았다. 컴퓨터 화면 위에 떠 있는 자신의 이름과 사진. '적합'이라는 낙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녀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손끝을 무릎 위에서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나도, 이미 대상이었던 거야.”
그녀의 숨이 얕아졌다. 이 사건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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