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우려는 손길, 그 끝에 내 이름이 있었다.
"이건… 내 이름이야."
아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모니터 속에는 ‘류아진, 후보 등재일: 2022.11.09’라는 문구와 함께 그녀의 얼굴 사진이 선명히 떠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민호는 숨을 삼키며 화면을 응시했다.
"아진 씨, 이건 우연이 아니에요. 당신이 이 사건에 휘말린 게… 어쩌면 처음부터 계획된 일일지도 몰라요."
비틀거리듯 몸을 돌린 아진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손끝이 서서히 식어가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 이름 석 자는 단순한 텍스트가 아니라, 그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잊고 있던 미래를 동시에 침범하는 감각처럼 다가왔다.
화면에는 '후보자 리스트'라는 제목 아래 연령, 직업, 심리 상태뿐 아니라 '기억 안정성'이라는 생소한 항목이 함께 나열돼 있었다.
"기억 안정성? 그게 무슨 의미죠?"
아진의 질문에 민호가 화면을 스크롤하며 대답했다. "마취 중 기억을 지우거나 조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지표일 수도 있어요. 마치… 실험 대상처럼."
말끝을 흐린 민호의 음성에는 분노와 무력감이 동시에 배어 있었다. 아진은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연결되지 않았다. 다만 기억 저편에서 불쑥 떠오른 하나의 장면.
‘그날’이었다. 커리어가 무너졌던 회식 자리. 술에 취해 실수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 장면이 촬영되어 퍼졌고, 순식간에 그녀는 ‘사회적으로 매장’됐다. 누군가 고의로 조작한 것처럼 빠르고 결정적인 ‘나락’이었다.
"그 영상들, 다 조작이었을까? 회식 날 그 장면도…."
혼잣말처럼 중얼이는 아진의 말에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어요. 누군가 아진 씨를 여기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흠집을 낸 거라면 가능하죠."
USB 안의 다른 폴더를 연 민호의 손이 멈췄다. ‘Dossier: Subject_019’
"이게 그 노인의 얼굴을 가진 의뢰인의 코드명인가 봐요."
파일을 열자, 수술 전의 젊은 여성 얼굴 사진이 떴고, 이어지는 영상에서는 차가운 형광등 아래 수술대에 누운 그녀가 보였다. 마취 직후, 얼굴 주변으로 기계장치가 천천히 움직였고, 음성이 울렸다.
“피부 대체 프로그램 작동.”
뒤이어 직원들의 대화가 녹음으로 재생되었다.
“그녀가 기억을 되찾기 전에 조치해야 합니다.”
“복원은 불가능합니다. 얼굴 이식은 이미 고정됐습니다.”
“그녀는 이제, 우리 것 중 하나야.”
의료진의 말투는 소름 끼치도록 차분하고 차가웠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부품을 교체하듯 사람의 얼굴을 바꾸고, 그 사실을 무덤처럼 봉인한 채 살아가게 만드는 일.
아진은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몸을 뒤로 기대었다. 폐 속 깊은 곳까지 공기가 차올랐다가, 무겁게 빠져나갔다.
민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이 병원, 평범하지 않아요. 이건 단순한 의료 사고나 미용 시술이 아니에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에요."
아진은 여전히 화면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더는 흔들림이 없었다. 대신, 깊고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은 하나였다. '왜 하필 나지?'
이것은 단순한 피해의식이 아니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선택되었고, 무언가의 일부가 되기 위해 낙인처럼 찍힌 사람이었다. 과거가 아니라, 그녀가 앞으로 겪을 미래마저도.
탐정사무소로 돌아온 두 사람은 늦은 밤까지 자료를 정리했다. 민호는 아진에게 따뜻한 커피를 건네며 물었다.
"그만둘 생각은 없나요? 지금이라도, 이 사건에서 손 뗄 수 있어요."
아진은 커피잔을 들고 잠시 침묵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생각과 기억, 잃어버린 자아의 조각들이 출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이제야 확신이 들어. 난 이걸 끝까지 쫓아가야만 해."
모니터에는 여전히 후보자 리스트가 펼쳐져 있었다. 어떤 이름은 '완료됨', 어떤 이름은 '진행 중'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하단, 붉은 글씨로 또렷하게 쓰인 문구.
“Phase III: 복제 시도 예정.”
민호와 아진은 동시에 그 문장을 읽었다.
"복제…?"
무거운 침묵이 사무실 안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이제 '기억'이나 '얼굴'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조작하고 바꾸려는 거대한 의도 앞에 서 있었다.
아진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온몸이 떨릴 만큼 두려웠지만,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시작됐어. 이제 멈출 수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으며, 사라진 진실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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