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복제의 문턱에서

너의 이름을 가진 또 다른 나

by Helia

"Phase III: 복제 시도 예정."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숨을 들이켜도 목 끝에 차가운 금속조각이 걸린 듯 답답했다. 민호가 마른침을 삼켰고, 아진은 모니터에 고정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제 농담 따윈 통하지 않겠네요."

민호의 말에도 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창가에 걸터앉아 바깥을 바라봤다. 밤하늘 아래, 차들이 지나가고 있었고 전신주 아래 누군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평범한 일상이 이 순간, 유리창 너머의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우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진의 목소리는 자조 섞인 독백이었다. 민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보를 빼내는 수준까진 이해했어요. 가짜 신분, 허위 기록. 근데… 존재를 복제한다는 건…"

"사람을, 물건처럼 다룬다는 거지."

그녀의 말에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빛은 흔들렸다. 그 순간, 아진의 머릿속을 스친 건 의뢰인의 주름진 얼굴과 메마른 눈동자였다. 자신의 얼굴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던 그 여인의 침착함. 공포가 아닌 절망이었던 그 표정.

그날 밤, 아진은 사무실에 남아 의뢰인 ‘Subject_019’의 자료를 정리했다. 수술 전후 영상, 목소리 녹취, 얼굴 사진. 차례로 정리하던 중, 하나의 사진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이 사람… 어디서 봤지?"

병원 간호사로 등록된 인물의 얼굴. 익숙했다. 아진은 기억을 더듬었다. 뷰티 화보 촬영장에서 보았던 보조 스태프. 이름도 같았다. 민호가 재빨리 검색을 돌렸다.

"이 사람, 원래 간호사가 아니에요. 과거 모델 보조 출신. 다른 이름으로 활동했어요."

그뿐 아니었다. 병원 직원 중 일부는 과거 조명 기사, 마케터, 헤어디자이너 등 전혀 다른 경력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어느 순간 기록에서 '사라진 사람들'이었다.

"이 병원, 그냥 병원이 아니야. 누군가 의도적으로 꾸민 장소야. 역할을 주고, 신분을 세탁하고… 마치 세트를 짜듯 만들어낸 거야."

다음 날, 두 사람은 병원의 법적 기록을 추적했다. 시청, 보건복지부, 정부 데이터베이스까지 열람했지만 병원 설립에 관한 정보는 최근 3년 전부터 ‘비공개’ 처리되어 있었다. 병원의 법인 명의는 존재하지 않았고, 대표자 이름조차 없었다.

"이건 유령 병원이야. 실체는 있지만, 아무도 정체를 몰라."

민호는 믿기 힘든 현실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진은 노트북 화면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잠금 파일을 가리켰다. ‘Room B-2: 감시기록’. 아이콘 옆에 작은 자물쇠가 깜박이고 있었다.

"비밀번호가 필요하네요."

"기억 안정성."

민호가 중얼였다.

"응?"

"이전에 봤던 실험 기록들에 있었어요. 피실험자의 기억 안정성 수치. 기억을 얼마나 조작할 수 있는지를 수치화한 것 같았어요. 그리고 아진 씨도... 그 리스트에 있었죠."

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제 본 화면. 자신의 이름이 담긴 문서. ‘류아진, 후보 등재일: 2022.11.09’. 그녀의 사진 옆엔 ‘기억 안정성: 81.4’라는 수치가 또렷이 적혀 있었다.

"그게… 내 이름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기억이 끊긴 순간이 있나요? 어떤 날, 며칠간 흐릿하게 남은 기억이라든지."

아진은 그제야 떠올렸다. 회식 이후 갑작스럽게 커리어가 무너졌던 그 시점. 누군가 그녀의 실수를 SNS에 폭로했고, 마녀사냥처럼 퍼졌다. 하지만 당시의 영상은 본인조차도 낯설게 느껴졌다. 어딘가 이상하게 편집된 느낌. 누군가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처럼.

"혹시 그게… 시작이었을까. 날 리스트에 올리기 위해, 일부러 실수를 만들어낸 거라면."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 충분해요. 누군가 아진 씨를 실험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먼저 낙인을 찍은 거죠. 사회적 격리, 명예 실추. 그렇게 해야 병원으로 끌고 올 수 있으니까."

두 사람은 노트북 화면을 다시 바라봤다. 감시기록 파일의 잠금 아이콘이 여전히 깜박이고 있었다.

"비밀번호는… 뭘까."

아진은 잠시 생각하다 중얼거렸다.

"나를 지우려는 손길, 그 끝에 내 이름이 있었다."

그녀는 키보드에 자신의 이름을 타이핑했다. ‘류아진’.

잠금이 풀리며 화면이 열렸다. 영상 폴더, 메모, 로그 파일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영상 하나를 클릭하자, 병원 내 CCTV 장면이 재생됐다. 화면에는 수술복을 입은 여성들이 무표정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환자 한 명이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다음 순간, 그 환자의 얼굴 위로 마치 투명한 막처럼 다른 얼굴이 겹쳐지는 장면이 포착됐다.

"이건… 실시간 가면 씌우기?"

민호가 중얼였다. 영상엔 시간 정보가 있었고, 정확히 두 시간이 소요된 걸로 표시돼 있었다.

"의뢰인의 말과 정확히 일치해요. 마취 후 두 시간."

마지막 영상은 더 충격적이었다. 병원 복도. 아진이 지나가고 있었다. 화면은 몰래 설치된 듯한 앵글이었고, 그녀가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선 장면이 포착됐다.

"… 이건 뭐죠?"

민호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병원에 있었어. 그런데 기억이 없어."

아진은 의자에 앉아 머리를 감쌌다. 점점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 사건의 외부인이 아니었다. 피해자이자 실험의 일부.

그 순간, 또 하나의 메시지 창이 떴다. ‘Phase IV: 정체성 이식 테스트’. 예정일: 2023.11.11. 대상자: 류아진.

민호는 화면을 가리켰다.

"이건…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예정이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죠."

아진은 모니터를 꺼버렸다. 침묵. 무거운, 견딜 수 없을 만큼 고요한 정적.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시작됐어. 이제, 멈출 수 없어."

창밖 어둠 속에서 차 한 대가 병원 쪽으로 조용히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 안엔, 누군가가 또 다른 실험 대상을 향해 이름 없는 서류를 꺼내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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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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