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사라진 얼굴, 두 개의 삶

거울 속의 타인

by Helia

아진은 빌라를 나서기 직전까지도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문틈 사이로 보인 의뢰인의 눈동자는 묘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공포와 체념, 그리고 의심. 마치 자신의 얼굴조차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삶은 뒤바뀌었고, 이름조차 위협받고 있었다. 진실은 서류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현실을 침범한 누군가의 발자국이 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사무소로 돌아온 아진은 책상에 서류를 펼쳐놓았다. 의뢰인의 이름이 쓰인 두 장의 기록. 주민등록번호는 같았지만, 병원명과 서명은 달랐다. 최근의 기록은 서울 외곽의 한 개인병원에서 경신된 것이었다. 그 병원은, 지금도 운영 중이었다.

"민호, 그 병원 정보 다시 확인해 줄 수 있어?"

민호는 이미 조사해 둔 문서를 가져왔다. 평범한 2층 건물. 온라인 리뷰도 몇 개 남아있었다. 주로 동네 노년층을 대상으로 하는 내과.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진은 직감했다. 이 사건은 그런 평범한 장소 안에 진실을 숨겨두고 있다는 걸.

그날 오후, 아진은 곧장 병원을 찾았다. 접수처에 조심스레 의뢰인의 이름을 대자 직원은 당연하다는 듯 진료기록을 열람했다.

“지난주에 다녀가셨어요. 혈액검사 결과는 정상이었고요. 혼자 오시는 편이에요.”

하지만 키와 몸무게, 혈압 수치 모두 이상했다. 분명 의뢰인의 것이 아니었다. 아진은 물었다.

“그분… 최근에 외모가 많이 변하진 않으셨어요?”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항상 깔끔하게 오세요. 친절하시고, 말씀도 조곤조곤 잘하시고.”

모든 정보가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진짜 그녀’가 아니란 점이었다.

사무소로 돌아온 아진은 SNS 검색을 시작했다. 과거 의뢰인의 닫힌 계정이 갑자기 최근까지 활동한 흔적이 보였다. 한 달 전, 커피숍에서 찍힌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어딘가 이상했다. 각도, 웃음, 배경. 표면적으로는 문제없어 보였지만 직감은 다르게 말했다. 사진 속 인물은, '그녀처럼 보이기 위해 연기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존재해.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가 그녀로 살아가고 있어.”

그 말은, 원래의 그녀가 현실에서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다음날 아침, 아진은 의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율 씨.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하지만 응답은 없었다. 세 번의 전화, 두 번의 문자, 이틀간의 기다림.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아진은 다시 빌라를 찾았다. 벨을 눌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현관문 앞에는 낡은 우편물과 함께 메모 하나가 붙어 있었다.

“전입자 없음. 기존 거주자는 타 지역으로 이전함.”

이름도 흔적도, 말소되어 있었다. 관리인에게 물어도 “며칠 전 급하게 이사 갔다”고만했다. 잔금도 현금으로 처리했고, 연락처도 남기지 않았다는 말에 아진은 등을 떨었다. 그녀는 또다시 사라졌다.

사무소로 돌아온 아진은 창가에 앉아 커튼 너머 거리를 바라봤다. 이 사건은 단순한 실종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의도 아래, 기억과 얼굴, 그리고 삶이 조작되고 있었다. 아진은 더 이상 외부인의 입장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은 그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현실’의 기준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날 밤, 민호는 늦은 시각까지 퇴근하지 않았다. 그는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열었다.

“아진, 조금 전에 병원 출입기록 관련해서 데이터 하나 더 받았어.”

모니터에 띄운 것은 병원 보안 시스템의 출입기록. 그 안에는 ‘장하율’의 이름으로 출입한 흔적이 또 있었다. 병원에 등록된 인물의 사진은 흐릿했지만, 얼굴 인식 매칭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사진 속 인물은—의뢰인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아진. 혹시 이 사람… 전에 병원에서 마주쳤던 사람 아냐?”

아진은 눈을 떴다. 사진 속 여성은, 병원 내과에서 스쳐 지나가며 아진과 눈이 마주쳤던 중년 여성이었다. 그때는 의심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했다. 누군가, 의뢰인의 정체성으로 ‘대리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 누군가가 의뢰인의 삶을 완전히 복제한 거야.”

그녀의 이름, 생년월일, 병력 기록, 얼굴 사진까지. 의뢰인의 삶은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이어지고 있었다.

아진은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집었다. 차가운 도자기 잔이 손끝을 스쳤지만 감각은 멀었다. 이 사건의 중심엔 단순한 얼굴 위조나 행정 착오가 아니었다. 존재의 이중화. 정체성의 이식.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기술과 권력의 조합.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야. 시스템 전체가 움직였다는 뜻이야.”

민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장하율 씨는 누군가의 ‘프로젝트’였던 걸까? 단순히 사라진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실험당한?”

아진은 대답 대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은 짙어가고 있었고, 도시의 불빛은 너무 밝아서 그림자를 감추고 있었다. 그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얼굴은, 조용히 그녀의 삶을 대신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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