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침묵을 찢는 목소리

우리가 사라지기 전에

by Helia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지하 2층의 그 끈적한 어둠에서 벗어난 아진과 민호는 잠시 숨을 고르며 멈춰 섰다. 낯선 도시의 새벽, 고요한 빛줄기 아래에서 그들은 비로소 살아 있음을 실감했지만, 그 고요함은 곧 짓이겨질 폭풍의 전조였다.

아진의 손엔 작은 USB가 쥐어져 있었다.
이 작은 칩 안에는 인간의 이름을 지우고, 타인의 삶을 덧씌우는 자들의 만행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누나… 이걸 어떻게 세상에 알리지?”
민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눈동자엔 두려움과 결의가 교차하고 있었다.
“이건 그냥 불법 실험이 아니에요. 류성민은 단순한 의원이 아니라, 뒤에 거대한 자본과 권력이 붙어 있는 사람이에요.”

아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USB를 더 꽉 쥐었다.
“그래서 더 알려야 해. 이소진 씨처럼… 더는 아무도 사라지게 둘 순 없어.”

그들은 근처 폐창고 옆에 차를 세우고, 노트북을 꺼냈다.
민호는 전원을 켜고 숨을 고른 뒤, 조심스레 USB를 연결했다.

화면이 켜지자 수많은 암호화된 폴더가 떠올랐다.
‘Project: 오버로드’.
이름부터 불길했다. 민호는 빠르게 파일 구조를 해독해 나갔다.

“여기 있어요. 회계 기록, 실험 프로토콜, 그리고… 참여자 명단.”
그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날았다.
“류성민, 강호재, 김 회장, D의료재단, 명진병원… 이건— 그냥 정치적 음모가 아니에요. 이건 카르텔이에요.”

아진의 눈이 커졌다.
화면엔 수십 명의 이름과 얼굴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재계 인사, 의료계 권위자, 언론사 간부, 고위 공직자들이었다.

“여기… 생체 이식 대상자 리스트까지 있어.”
민호가 떨리는 손으로 하나의 이름을 가리켰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미 사망했는데,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에요.”

“이게 세상에 알려지면… 대한민국이 뒤집히겠지.”
아진은 숨을 삼켰다.
“이 사람들… 배우자도, 자식도, 자신이 알고 있는 가족이 사실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거야.”

바로 그때였다.
민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윤 형사’.

“지금 받지 마. 위치 추적당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이미 전화는 연결되었다.

[“아진 씨! 지금 바로 도망치세요! 류성민 측에서 전국 수배령을 내렸어요. 둘 다 위험해요! 휴대폰 전원 끄고, 어디든 숨어야 해요! 그리고 그 자료… 절대, 절대 넘기지 마세요!”]

뚝.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민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진짜 시작됐네요.”

그 순간, 노트북 화면이 번쩍이며 일시적으로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뭐지…?”
민호가 빠르게 코드를 입력했다.
“누군가 이 서버에 접근 시도했어요. 우리 위치도 노출됐을 가능성 높아요.”

차창 너머 멀리 검은 승합차 한 대가 서서히 지나갔다.
한동안 조용하던 골목에 CCTV가 회전하며 그들의 차량을 향했다.

“누나… 이러다 진짜 잡혀요.”

아진은 침묵했다.
그녀는 과거, 한순간의 실수로 세상에서 지워진 사람이었다.
이번엔— 타인의 삶이 지워지는 걸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민호야, 방송국이야. 우리가 가진 자료, 그들이 알릴 수 있어.”

민호는 아진을 바라봤다.
“‘진실을 찾아서’? 누나가 예전에 일하던 프로그램이요?”

“PD는 나를 믿어. 아직도 정의감 있는 언론인 중 하나야.”

“하지만 생방송 송출 서버에 직접 접근하려면… 내부 해킹밖엔 방법이 없어요. 그리고 그건…”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거 알아. 하지만 우리가 가진 이 정보는, 그냥 기자가 메일로 넘긴다고 세상에 퍼지지 않아. 이건— 제대로 폭발시켜야 해.”

민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예전에, 병원에서 실종된 친구가 있었어요. 퇴원하긴 했는데… 그 애는 그 애가 아니었어요. 말투도, 기억도, 감정도.
그냥… 껍데기만 같았어요.”

아진은 민호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난 계속 의심했어요. 내가 틀린 건 아닐 거라고. 지금 그 USB 안에 있는 자료… 그 애가 겪었던 일이 전부 사실이었어요.”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단해졌다.
“전 할 수 있어요. 서버 뚫고, 방송국 송출 시스템에 자료 실시간 투입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건— 너를 드러내는 일이야. 해커로서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어.”

민호는 웃었다.
“그 애가 잃은 것보단 작죠.”

그들은 곧바로 차량을 돌려 방송국으로 향했다.
도심은 이제 막 아침 햇살에 젖어들고 있었지만, 그들의 가슴속은 이미 한낮보다 더 뜨겁고 어두운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고발이 아니라
존재를 빼앗긴 이들의 이름을 되찾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세상에 되돌리는 단 한 번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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