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조각난 진실의 윤곽

그 이름은 나였다.

by Helia

창밖의 바람이 미세하게 흔들리던 오후였다. 무심히 지나치기엔 너무 선명한 진실 하나가, 아진의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책상 위에 펼쳐진 진료기록 파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날 민호가 입수한 병원 내부 자료들. 수많은 파일 중 단 하나, 그녀의 눈을 사로잡은 날짜가 있었다.

“이건… 한두 번이 아니었네요.”

그날은 의뢰인이 수술을 받은 날이었다. 하지만 병원 기록에는 전혀 다른 환자의 이름이, 전신 성형 수술로 등록돼 있었다. 낯익은 이름이었다. 아진은 기억을 더듬어 인터넷을 뒤졌다. 5년 전, 성형 부작용으로 자살한 여성의 이름이었다.

“얼굴을 바꾸는 장사를 해온 거야…”

그녀는 중얼이며 기록지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누렇게 바랜 종이, 손때 묻은 주름, 반복된 수술 코드와 마취 기록. 그리고 동일한 병실. 하나같이, 수술 후 사라진 환자들.

아진은 경찰청에 있던 후배 기자에게 연락해 확인받은 사건 몇 건의 공통점도 곁들여 정리했다. 무연고 시신. 성형외과 연계 병원. 신원 미확인. 뉴스에 보도되지 않은 미심쩍은 사례들이었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정교했다.

그날 오후, 아진과 민호는 병원 근처 오래된 주차장 뒤편에 있는 폐창고를 찾아갔다. 그곳은 민호가 미리 위치를 확보해 둔 곳이었다. 녹슨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열자, 어두운 실내에 먼지가 떠올랐다.

“형광등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네요.” 민호가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둘은 조심스레 창고 안을 살폈다. 녹슨 캐비닛, 깨진 거울, 낡은 수술복. 그리고 맨 끝쪽, 덮여 있던 천을 걷자 나타난 상자들. 수십 장의 복제된 주민등록증, 전신 성형 전후의 비교 사진, 그리고 오래된 카메라 여러 대가 들어 있었다.

“이게 다… 누군가의 삶이었겠지.”

아진이 조용히 말했다. 사진 속 얼굴들은 수술 전과 후를 비교한 흔적이 뚜렷했다. 원래의 얼굴은 철저히 지워지고, 새로 만든 얼굴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다른 사람의 삶을 그대로 입고 살아가는 자들. 그리고 그 자리를 빼앗긴 사람들.

“아진, 이건...”

민호가 한 장의 사진을 들어 보였다. 얼굴은 낯설었지만, 아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의뢰인이었다. 수술 후 노인의 얼굴로 바뀐 그녀. 그 옆엔 누군가가 새 얼굴을 단 채 웃고 있었다. 마치 그 얼굴이 자신의 것이기라도 한 듯 자연스러운 미소로.

“누군가가, 누군가의 삶을 통째로 빼앗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이건 단순한 사기극도, 병원 과실도 아니었다. 구조적인 범죄였다. 조직적으로 기획된, 신분 교체와 삶 탈취의 완벽한 시스템.

의뢰인은 단지 눈가 주름을 펴는 시술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짧은 마취가 끝났을 때, 그녀의 삶은 전혀 다른 사람의 것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그녀는 사라졌고, 그녀의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인물이 사회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아진은 병원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에 주목했다. 원장은 모든 기록을 수정하고 삭제할 수 있는 전권을 쥐고 있었다. 진료기록, 보험 정보, 신분 확인 문서까지. 그런 그가 수년간 신분 세탁을 도왔다는 건, 단순한 의혹이 아니었다.

그 대가로 오간 돈은 어마어마했다. 내부 자료엔 전직 고위 공무원의 이름도, 재벌 2세, 실종된 정치인의 이름도 있었다. 이름과 얼굴을 바꾼 그들은 법망 밖으로 도망쳤고, 병원은 그들의 탈출구가 되었다.

그런데 그중 하나의 기록이, 아진의 눈을 붙잡았다.

한 탐정의 보고서. 그 이름은—‘정민호’. 접촉일은, 아진이 탐정사무소에 들어오기 직전이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민호, 이건 뭐야?”

아진은 파일을 들고 민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경직된 표정이 떠올랐다. 민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처음엔 단순한 의뢰였어요. 병원 관계자가 누군가를 추적해 달라고 했죠. 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그 안에, 누나 이름이 있었어요.”

“내 이름?”

“누나가 사회에서 매장당하고, 사진계에서 퇴출된 계기—그게 전부... 이들과 연결돼 있었어요.”

순간, 아진은 숨을 쉴 수 없었다. 심장이 옥죄듯 조여왔다. 세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과거. 고작 술자리 실수 하나로 매장되었던 경력. 그 모든 것 뒤에, 이들이 있었다?

“왜 이제야 말하는 건데?”

“말할 수가 없었어요. 나도 몰랐으니까. 누나가 이 사건에 깊이 발을 들이기 전까진, 이게 얼마나 복잡하고 위험한 건지 실감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제 알겠어요. 이건, 누나와 나, 우리 모두를 조종해 온 일이었어요.”

아진은 손끝이 떨렸다. 모든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의뢰인의 얼굴이 바뀐 이유, 병원의 은폐, 그녀 자신의 퇴출 사건까지—모두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진실은 언제나 예상보다 더 조각나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은, 이제야 비로소 하나의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아진은 사진들을 정리하고 파일을 챙겼다. 민호 역시 무거운 표정으로 조용히 그녀를 도왔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은 단 하나였다. 이 진실을 어떻게든 세상에 알리는 것.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Helia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557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40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67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