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봉인된 진실의 입구

봉인된 기억, 삭제된 이름

by Helia

"사망 시각은 오늘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 외부 침입 흔적은 없습니다."

형사의 말이 귀에 박히자, 아진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삼켰다. 두 눈에 떠오른 건, 이틀 전 마주했던 그 얼굴이었다. 아직 젊은데도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그녀의 첫 의뢰인. 몇 날 며칠 잠 못 이루며 진실을 파헤치던 그녀가, 이제 싸늘한 시신이 되어 병원 안치실에 누워 있었다.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민호는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렸다. 그는 어젯밤부터 의뢰인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휴대폰을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손끝은 떨렸고, 눈빛은 미처 감정을 따라잡지 못한 채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경찰은 자살로 보고 있어. 수면제도 발견됐고, 탁자엔 유서 같은 메모도 있었대."

아진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한기가 온몸을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스스로 생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었어. 오히려, 이 진실을 밝혀달라고 간절하게 매달렸잖아.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던 사람이, 그렇게 쉽게 끝냈다고?"

형광등 아래, 의뢰인의 얼굴은 살아생전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주름진 피부, 고요한 눈동자. 잃어버린 이름과 존재를 되찾기 위해 그녀가 흘렸던 눈물들이, 이제야 말없이 진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병원을 나서는 순간, 민호가 갑자기 아진의 팔을 움켜잡았다.

"누나. 뒤에, 누가 따라오고 있어."

그의 말에 아진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길 건너편, 짙은 선팅이 된 차 안.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운전석에 앉아, 창 너머로 그들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천천히 선글라스를 벗어 올렸다.

민호는 아진을 이끌고 병원 옆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그 남자. 병원 보안 기록에서 본 적 있어. 원장 바로 밑의 보좌관, 정형식이라는 인물이야."

"지금… 우리를 미행하고 있다는 거야?"

"아니. 그보단, 본격적인 경 고지. 우린 선을 넘은 거야."

아진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가슴 한가운데 무언가 날카로운 게 박히는 듯한 감각. 그녀는 차라리 공포보다 분노가 앞섰다. 누군가가 진실을 덮으려 들고 있었고, 그 대상은 이제 자신과 민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민호의 작업실로 몸을 피했다. 셔터를 내리고, 창문을 가린 채 불빛 하나 새어 나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바깥은 잠잠했지만, 그 고요함이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아진은 노트북을 열고 USB를 꽂았다. 이틀 전 확보한 자료. 전에는 열리지 않았던 암호화된 폴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민호가 조심스럽게 복호화를 시도했다. 화면에 잠시 노이즈가 흐르고, 이내 한 폴더명이 떠올랐다.

> [실험실_0층]

누르자, 몇 개의 문서와 이미지 파일, 영상 하나가 나타났다. 가장 먼저 눈에 띈 문서는 프로젝트 개요서였다.

> 프로젝트명: 신체전이 실험군_C
대상자: 류아진 외 3명
목적: 고위 인물의 신분 이식, 사회적 이미지 교체, 기억 주입 실험
성공률: 낮음 (기억 삽입률 12%)
부작용: 자아 붕괴, 신체 노화 현상 가속
상태: 실험 중단 / 실패 대상 제거 조치 중

아진은 온몸이 굳었다. 손끝에서 감각이 사라졌고, 머리는 멍해졌다. 그녀의 이름이, 저 문서에 정확하게 찍혀 있었다.

"이게... 진짜야? 내가... 실험 대상이었단 말이야?"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죄책감이 얽혀 있었다.

"처음엔 몰랐어. 그저 병원 시스템 오류 사건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자료 안에서 누나의 영상이 나왔어.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선배랑 말다툼하던 장면이 병원 기록과 연결되어 있었고, 마치 감시 영상처럼 보관되어 있었어."

아진은 숨이 가빠왔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폐가 수축되는 느낌. 그 영상이, 그녀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야,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민호는 다시 USB를 탐색했다. 이번엔 영상 파일을 열었다. 실험실 내부였다. 벽은 모두 금속 패널로 덮여 있었고, 전자기기와 침대, 그리고 카메라가 설치된 밀실. 누군가가 피실험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당신의 이름은?"

잠시의 정적. 이어서 들려온 대답은, 아진의 목소리였다.

"… 류아진입니다."

그리고 화면 속 그녀의 얼굴은, 지금의 얼굴과 다르게 보였다. 더 젊었고, 생기 있었다. 아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기억나지 않는 순간들. 하지만 분명히, 자신이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작업실의 벽 너머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가 문손잡이를 툭 건드리는 소리. 민호는 재빨리 책상 서랍을 열고 망치를 꺼냈다. 아진은 노트북을 닫고 USB를 뽑아 가슴에 품었다.

"형식일지도 몰라."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다시, ‘쿵, 쿵, 쿵’. 정확히 세 번.

민호가 침 삼키듯 중얼거렸다.

"경고야. 우리가, 다음이라는 뜻이지."

아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이제 다시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녀는 조용히 USB를 쥔 손을 쥐었다. 진실은 봉인되어 있었고, 그 봉인을 풀 열쇠는 지금 그녀의 손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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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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