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사라진 층, 실험군의 이름으로

지하의 문이 열린 순간, 진실이 눈을 떴다

by Helia

“여기야.”

민호가 손전등을 들어 올렸다. 병원의 폐쇄된 엘리베이터 뒤편, 두꺼운 벽돌을 뚫은 작은 입구가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도면에도 표시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지하 1층에서 더 아래로, 벽 사이에 숨겨진 계단이 이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계단을 내려갔다. 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스치고, 발밑은 먼지와 곰팡이로 덮여 있었다. 지하 2.5층쯤 되는 곳. 삐걱이며 열린 철문 너머, 바닥에 흩어진 서류들 사이로 ‘Project: 생체전이 실험군 0-A’라는 글씨가 적힌 문서가 눈에 들어왔다.

아진은 서류를 집어 들었다. 낡은 클립에 묶인 문서의 첫 장에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이소진...”

그녀의 첫 의뢰인이자, 성형외과 시술 후 노인의 얼굴로 변해버렸던 여성. 그 이름은 분명히 실험 대상자의 목록 맨 위에 적혀 있었다.

민호가 곁으로 다가왔다. “누나, 이건 그냥 단순한 성형 부작용 같은 게 아니야. 이건... 생체 정보를 덧씌우는 실험이야.”

“생체 정보?”

“쉽게 말해서, 한 사람의 외형을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거지. 정확히는, 생물학적 전이.”

아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류를 넘겼다. 실험기록지엔 이런 문장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 [실험 대상자] 이소진 (1988년생) [전이 대상자] B-083 (1980년생 여성, 신원 불명) [결과] 피험자 이소진, 신체 반응 강하. 정신은 유지되었으나 외형 변화 발생.



그녀는 문서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더듬었다.

“소진 씨는… 얼굴을 ‘뺏긴’ 거야.”

민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그 얼굴로 누군가가 소진 씨의 삶을 대신 살고 있겠지.”

아진의 머릿속에 소진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올랐다.

‘혹시… 제가 없어져도, 기억해 줄 수 있나요?’

그건 단순한 유언이 아니었다. 존재를 통째로 ‘소거’당한 사람의 절규였다.

민호가 손에 쥔 또 다른 문서를 아진에게 내밀었다.

“누나, 이거 봐. 이 이름…”

“류신하?” 아진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사람, 나랑 예전에 작업했던 정치인 보좌관이야.”

“그 신하가 여기 왜 있는 건데?”

“이건 단순한 병원 내부 문제 아니야. 더 위에 뭔가 있어.”

정적이 흘렀다. 아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쇄된 공간에서 숨죽이며 살아왔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민호. 뒤로는 못 물러나.”

“... 그래, 선배. 이제는 시작이니까.”

아진은 바닥에 흩어진 문서들을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 그 안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진실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처음 ‘시크릿 탐정사무소’의 문을 열던 날보다 훨씬 단단하고 명료했다.

그들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병원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진실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아진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이름이 지워진 자들의 목소리를, 그녀는 반드시 세상 밖으로 꺼내려했다.

그녀는 이미 결심한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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