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장|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이별보다 외로웠던 관계

by Helia

클래식 추천곡:
Max Richter – On the Nature of Daylight


이제 와서 뭐가 그리 아쉬운지 모르겠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나타난 사람.
어떤 계절보다 뜨거웠고, 누구보다 가까웠으며, 끝내 누구보다 멀어진 사람.
나는 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한 수많은 말들 중 딱 한 문장을 속으로만 되뇌었다.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그 말 한마디가 모든 감정의 요약이었다.
울고 싶을 만큼 사랑했던 나날도, 매번 참았던 오해와 서운함도,
그저 한 번쯤 날 먼저 알아봐 주길 바랐던 마음도,
결국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메아리로 남아버린 것이다.

처음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따뜻했고, 자상했고, 배려할 줄 알았고,
무엇보다 내 마음을 먼저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따뜻함이 오래도록 지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바뀌기도 하고,
더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바뀐 줄 알았던 내 착각’이 시간이 흐르며 드러나는 것뿐이었다.

처음 나를 아껴주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말을 걸어도 핸드폰 화면만 바라봤고,
내가 아픈 날에도 피곤하다며 잠을 청했다.
기념일은 기억하지 못했고,
내가 무너질 때는 “그런 감정적인 얘긴 나중에 하자.” 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점점 그 사람의 ‘일상’ 속으로 묻혀가고 있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때의 나는,
도리어 나 자신을 자책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지금 바쁘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그러면서 스스로를 조용히 다독이며 견디는 쪽을 택했다.
그 사람은 몰랐겠지만,
나는 매일 사랑을 ‘증명’하듯 살았다.
애정을 구걸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던 하루하루였다.

그러다 어느 날,
아무 예고 없이 “우리 그만하자.”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싸우지 않았고, 붙잡지도 않았다.
붙잡는 게 지는 것 같아서가 아니라,
이미 끝났다는 걸 너무도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에.
눈물도 나지 않았다.
이별보다 슬픈 건, 이미 그 사람 곁에서 수없이 홀로였던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는 다시 나타났다.
어떤 말도 없이,
그저 예전처럼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잘 지냈어?”

그 짧은 한 마디에
가슴 한가운데 묵혀 있던 감정들이 고요히 출렁였다.
그를 다시 만나서 설렌 게 아니라,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 난 진심이었는데.’
라는 감정이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서운했던 날들을 길게 설명하고,
그때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를 이야기했을 테지만
이젠 아니다.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그 말은 나를 향한 독백이기도 했다.
그 사람을 사랑하느라 정작 나 자신을 얼마나 놓쳤는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을 더 잘 돌보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이제야 진짜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그때의 나는
사랑을 받기 위해 존재했던 게 아니라
사랑을 주는 나 자신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는 걸
지금에서야 인정하게 되었다.

이제는 누구보다 나를 먼저 챙긴다.
내 기분, 내 시간, 내 감정,
내 하루를 가장 잘 돌봐줄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니까.
다시 사랑을 하게 되더라도,
나는 더는 증명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줄 수 없다면
그건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었을 뿐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니까, 부디
다른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만큼은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라는 말을 듣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충분히 잘했고,
지금은 더 잘 살아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