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심연을 넘어, 새로운 이름

그림자가 남긴 빛

by Helia

시간은 흘렀고, 대한민국은 'Project: 오버로드'의 충격에서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사회는 상처를 꿰매듯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류성민을 비롯한 관련자들은 모두 법의 심판대에 올랐고, 사라졌던 이들의 신원 확인과 피해 보상 절차도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 김영자 할머니는 정부의 의료 지원을 받아 전문 요양시설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이소진은 더 이상 '류신하'가 아닌, 온전히 "희생자 이소진"으로 불렸다. 그녀의 이름은 이제 감추어진 진실의 상징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한때 잘 나가던 포토저널리스트였던 아진은, 더 이상 렌즈 뒤에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단순한 기록자가 아니라, 진실의 현장을 파고드는 탐사 보도 기자가 되었다. 그가 써 내려간 기사들은 정의를 향한 분노, 목격자의 죄책감, 그리고 증언자의 절박함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국민은 그녀의 기사를 통해 세상의 숨겨진 이면을 마주했고, 아진은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싸우는 상징이 되었다.

민호는 방송국 기술팀에 특채로 합류했다. 그는 보안 시스템의 개편과 데이터 복원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그 자리에서도 아진의 조력자로 조용히 힘을 더했다. 아진이 빛이라면, 민호는 언제나 그 뒤를 묵묵히 따라 걷는 그림자였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정리된 것처럼 보이던 어느 날에도, 아진의 마음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 있었다. "JD". 어둠 속에서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고는 사라졌던, 정체를 알 수 없는 조력자들. 경찰도, 정부도, 언론도 그들에 대해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완벽하게 흔적을 지우고 사라졌다. 그 미스터리는 아진의 머릿속을 늘 맴돌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언젠가 그들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자라고 있었다.

그 예감은 퇴근길, 골목 어귀에서 현실이 되었다. 늦은 밤,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번지는 인적 드문 골목. 뒷걸음질 치듯 걷던 그녀의 귓가에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울렸다.

"아진 기자님."

그녀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골목 입구에 누군가 서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너머,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실루엣은 그녀의 기억 속 어딘가와 겹쳤다. 바로, 류성민을 제압했던 JD의 요원이었다.

"당신은... 그때 그 사람?" 아진은 순간 경계심에 몸을 굳혔다.

남자는 천천히 다가왔다. 발걸음에는 위협보다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두렵습니까? 우리가 당신을 해칠 거라 생각합니까?"

아진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당신들은 누구죠. 왜 저를 도운 겁니까."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골목을 감싸던 침묵이 묘한 중력을 만들었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진실이 묻히지 않도록 돕는 자들입니다. 세상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정의가 필요할 때 개입합니다."

그의 목소리엔 슬픔이 묻어 있었다. 단순한 신념이 아닌, 고통의 기억을 동반한 슬픔이었다. "우리 중에도 'Project: 오버로드'의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고, 누군가는 존재를 지웠습니다. 당신은... 그 진실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죠."

그제야 아진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등장이 단순한 도움이나 정의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 역시 피해자였고, 잊히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잊지 않기 위해 행동했던 것이다.

"그럼 당신들은 어떤 조직이죠? 정보기관인가요? 혹은... 민간단체?"

남자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우리는 이름이 없습니다. 존재하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림자가 진실을 비치는 유일한 빛이 되기도 하지요."

그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USB였다. 아진이 과거에 확보했던 폭로 자료와 동일한 형식이었지만, 표면에는 빨간색 점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당신이 보도한 자료의 원본입니다. 그리고... 같은 구조의 움직임이 또 다른 형태로 감지되고 있습니다. 이름은 바뀌었고, 방식은 더 교묘해졌습니다."

아진은 USB를 받았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녀가 쥐고 있는 건, 또 다른 전장으로 가는 열쇠였다.

"계속 이런 일을 하실 건가요? 그림자처럼 숨어서, 세상의 진실을 대신 뒤쫓는..."

남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말했다. "세상에 어둠이 있는 한, 우리는 존재할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그 말과 함께 그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림자에 녹듯 사라진 그의 뒷모습은, 마치 오래된 약속처럼 잊히지 않을 인상을 남겼다.

아진은 골목에 홀로 남아, USB를 꼭 쥔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그녀의 눈빛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JD"의 정체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지만, 그들의 존재는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은 아진에게 또 다른 사명을 전했다.

이제 아진은 다시 펜을 든다. 이번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제 막 시작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시작의 이름은, 아진. 정의를 품은 또 다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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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쌓습니다. 기억과 계절, 감정의 결을 따라 걷는 이야기꾼. 햇살 아래 조용히 피어난 문장을 사랑합니다." 주말은 쉬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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