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 한시, 길 위에 놓인 안개꽂 한 다발

건네지 못한 꽃이 남기는 것들

by Helia

밤 열한 시, 나는 골목 끝에서 안개꽃 한 다발을 발견했다.
포장지는 습기 먹은 듯 축축했고, 리본은 풀린 채 발끝에 스쳤다. 누가 두고 간 걸까. 아니면 일부러 버린 걸까. 순간, 오래 잊어버린 이름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안개꽃은 하얀 숨결로 모여 있었다. 수백 개의 작은 별이 서로의 체온을 덮으며, 찬 공기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장미처럼 뾰족한 이야기도, 백합처럼 강렬한 향기도 없지만, 그 소박함이 오히려 눈을 오래 붙잡았다. 바람이 스치자 꽃송이들이 파도처럼 몸을 기울였다. 부서질 듯 가벼운데, 묘하게 단단한 모양이었다.

그 순간, 오래전 들었던 말이 스쳤다.
“네가 있으면 다른 것들이 더 예뻐 보여.”
칭찬처럼 들렸지만, 그 문장은 나를 한 걸음 물러서게 했다. 누군가를 빛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일, 그것이 곧 나를 잃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꽃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줄기가 손바닥에 닿자, 짧은 전류가 심장까지 번졌다.
안개꽃을 쥐고 있으니, 한 계절이 손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 속에는 건네지 못한 고백, 끝내 부르지 못한 이름, 봉투를 붙이지 못한 편지가 잔뜩 숨 쉬고 있었다.

기억이 이어졌다.
몇 해 전, 한 친구가 이유 없이 안개꽃 한 줄기를 건넸다. “그냥 네 생각이 났어.” 그 말은 그날 내 하루를 전부 바꿔놓았다. 특별한 날이 아니었는데, 그 ‘그냥’이라는 말이 오히려 가장 단단한 이유였다.
받지 못한 꽃보다, 건네지 못한 꽃이 더 오래 남는다는 걸, 나는 그날 알았다.

가로등 불빛이 꽃 위에 부서져 작은 눈송이처럼 반짝였다. 손등이 하얗게 물들고, 그 빛이 팔을 타고 가슴까지 스며들었다.
이 꽃을 건넬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건네지 않아도 괜찮았다. 꽃은 결국, 들고 있는 사람의 온기를 먼저 기억하니까.

멀리서 종소리가 울렸다. 마지막 버스가 떠나는 소리였다. 사람들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꽃을 내려다봤다. 안개꽃의 숨결이 차가운 공기와 섞여 흘렀다. 그 속에서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웃음과, 잃어버린 목소리가 스쳤다.
그 모든 것이 바람처럼 사라져도, 마음은 덜 허전했다.

안개꽃은 작지만 제법 넓은 세상을 품고 있었다.
하나의 꽃송이 안에 빛과 바람과 비가 스며 있었고, 사람들의 손길과 눈물이 내려앉아 있었다.
밤 열한 시의 고요 속에서, 그것들은 겹겹이 쌓여 부드럽게 숨을 쉬었다. 오래된 책장을 넘기는 소리처럼, 거기엔 쓰다 만 편지와 마침표 찍지 못한 문장, 부치지 못한 봉투가 있었다.

나는 안개꽃을 다시 길 위에 내려놓았다.
혹시 내일 아침, 누군가 발견하길 바라면서.
그 사람이 이 꽃을 들고 이유 없이 마음이 따뜻해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밤 열한 시, 안개꽃은 여전히 빛을 머금은 채 서 있었다.
빛은 오래가지 않겠지만, 오늘만큼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저 하얀 송이처럼, 누군가의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전혀 다른 풍경 속에서 또 다른 밤을 맞이하게 되리라.
그때까지, 안개꽃은 묵묵히 제 숨결을 지켜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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